일곱 번째 편지네.
오늘은 국어 수업을 준비하면서 수필 한 편을 읽었다. 오은 작가의 '이유 있는 여유'라는 수필이다.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보통 여유가 없다고 많이들 한다. 그런데 여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물질적 여유, 시간적 여유, 공간적 여유로 현재 처해 있는 상황으로 규정되는 여유. 둘째,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여유. 첫째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만, 둘째는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여유인 마음의 여유를 갖기 위해서는 의지와 간절함이 필요하고, 마음의 여유를 자발적으로 만드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주고 나를 인식하고 삶을 분명하게 만든다.
아빠도 늘 여유를 얻고 싶지만 학교 일에 바빠서 집안일에 바빠서 집에 오면 영화 한 편, 책 한 권도 보지 못 할 때가 있다. 글을 읽으니 마음의 여유에 대한 의지와 간절함이 없었던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만화를 보고 글을 쓰는 것이 남들에게는 노는 것처럼 보여 나쁘게 인식되어 꺼려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여유를 느껴지 못하고 마음만 초조할 뿐이었다. 이제는 적극적으로 마음의 여유를 만들고 나에 집중하는 시간을 만들어야겠다. 글을 읽고 글을 쓰고 영화를 보는 일을 통해 여유를 누려보려 한다.
재윤아!!!!
너도 훈련소에서 정신없이 바쁠 테지만 마음의 여유를 찾아보았으면 한다. 단 10분이라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나를 생각하고 주변을 생각하고 삶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한다.
다음에 또 편지 쓸게. 건강 잘 챙기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생활하기를 늘 기원한다.
스물아홉 번째 편지.
이제 훈련소 퇴소가 11일 남았구나.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지? 아빠는 코로나에 걸리지 않고 건강히 지내고 있다. 코로나 걸렸던 학생과 선생님도 이제 차츰 줄어들고 있구나. 곧 코로나도 잠잠해지지 않을까.
이제는 코로나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떻게 결정을 하느냐에 달린 것 같다. 백신 접종을 한 96%를 위한 정책이냐, 미접종자 4%를 고려한 정책이냐에서 선택인 것 같다.
어떤 정책도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정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희생되는 사람도 있을 거야. 내가 그 희생되는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준비하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희생된다면 그것은 운명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은 그렇고 인생이 그러하니까.
아빠가 너무 노인네 같은 말만 하는구나.
아빠의 또 하나의 꿈은 10여 평 정도의 집을 짓는 것이야. 50평 정도의 땅에 짓으면 좋겠다. 주말에 쉬는 별장 같은 용도, 퇴직 후 나가는 작업실 용도로 생각하면 돼. 금액은 1억 5천 정도.
엄마는 아파트에서 살고 아빠는 그곳으로 출퇴근하고. 매일 같이 있으면 불편해질 수 있으니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래야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 부모든 자식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동료든 모두가 그렇다.
네가 쓴 편지를 읽고 참 많이 놀랐다.
글 쓰는 솜씨가 좋고 내용도 풍부하고 솔직해서 많이 놀랐다. 앞으로도 글을 쓰는 습관을 들이면 좋겠다. 자주 이야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글로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필요하니까.
훈련소를 마치면 이제는 손편지를 쓰려고 한다. 매일은 어렵지만 1달에 두 번?
늘 그렇듯이 긍정적인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자기 전에 오늘 일을 되새기며 성찰하기를 바란다.
다음에 또 쓸게.
서른 번째 편지.
집에는 엄마와 아빠만 있다.
다시 둘만 있게 된 것이 20년 만이다.
그때는 설렘이 있었는데 이제는 허전함이 있구나. 늘 재송이와 네가 있어 집이 꽉 찬 기분이고 그냥 바라만 봐도 좋았는데 이제는 볼 수 없으니 아쉽구나. 그런 시간이 앞으로도 계속되겠지. 재송이도 너도 서산을 떠나 다른 곳에서 생활하겠지. 생각해보면 아빠도 그렇구나. 서산에 직장을 잡고 서울 떠나 할아버지 할머니와 떨어져 지낸 지도 벌써 25년 가까이 되었다. 너희들을 떠나보내고 나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음을 알 것 같구나. 그래서 자주 연락하고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늘 송구스러운 마음뿐이다.
눈을 뜨고 샤워하고 아침을 먹는다. 그러고 나서 버스 타고 학교에 간다. 교무실에 들어가면 학생들 자가진단 확인하고 교실로 들어간다. 조례를 하고 1교시 수업을 한다. 2교시는 해야 할 업무를 하거나 수업 준비를 한다. 3교시, 수업을 한다. 점심시간에 학생들 지도하고 교무실에서 도시락을 먹는다. 4교시, 수업을 한다. 5교시, 업무를 하거나 수업 준비를 한다. 6교시, 오래간만에 시간이 나서 커피를 마시거나 인터넷을 한다. 7교시, 수업을 한다. 종례를 한다. 정리하고 퇴근을 한다. 1시간 걸어서 집에 도착한다. 8시 늦은 저녁을 먹고 쉬면 하루가 끝난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면 다시 한 주가 시작된다. 늘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가운데 대전에 전화 한 통을 못 한다. 아마 재윤이도 그러겠지. 그래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한다.
내일은 토요일이니 대전 할아버지 할머니께 안부 전화라도 해야겠다.
재윤아!
이제 면회를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보고 싶구나. 그때까지 몸 건강히 잘 지내거라.
서른여덟 번째 편지.
오늘 수료를 앞둔 시점에서 분대별로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저번 사진도 그렇고 이번 사진도 웃는 모습이어서 보기 좋았다. 다른 훈령병보다 잘 생겨서 더 좋았다.
이제 훈련기간도 끝나가고 있구나. 고생 많았다. 남은 기간도 몸 건강히 마음 건강히 마치기를 바란다.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 길게만 느껴졌던 군 생활도 어느덧 1달이 지났구나. 하루하루 충실히 생활하면 끝이 보인다. 아빠가 군 생활하면서 즐거웠던 일 중에는 날짜를 지워나가는 것이었다. 하루하루 지워지는 날짜를 보며 뿌듯함을 느끼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었다.
진짜 군대생활은 자대에서 시작된다. 훈련소는 낯설었지만 그래도 같은 동기라는 친구의 느낌이 든다. 하지만 자대에는 동기는 몇 없고 대부분 선임들이다.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이것은 사회의 모습과 비슷하다. 네가 지금까지 경험한 세계는 동등한 관계가 많았다. 주변이 모두 내 친구고 또래여서 편했다. 하지만 군대와 사회는 상하관계로 이루어지고 동등한 관계는 없다.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내야 인정받고 무시당하지 않는다. 무시하지 못할 존재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남을 이기고 군림하기보다 자신을 지키고 남을 도울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겠지만 오늘을 충실히 살아야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며 글을 쓴다. 내일 또 편지 하마. 잘 지내거라.
서른아홉 번째 편지.
오늘은 학교에서 교단과 교탁을 교체하였다. 삐걱거리는 교단이 사라지고 무겁고 덩치가 큰 교탁도 사라졌다. 그리고 작년에는 칠판이 전자칠판으로 바뀌었는데 써보니 생각보다 편리했다. 많은 선생님들도 전자칠판에 익숙한 지 불평과 불편이 없더라. 아빠는 파워포인트를 활용하고 필요한 경우는 전자칠판에 필기를 했다. 노트북을 들고 다닐 필요도 없어 너무 편하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동화되니 내 마음이 편해졌다. 앞으로도 환경은 계속 변할 테니 또 적응해야겠지.
생각해보니 아빠가 교직에 있으면서 학교도 입시도 참 많이 변화했구나. 수시라는 대입전형이 도입되었고 논술과 적성고사도 있었다. 또 학생부 종합전형이 도입되었고 그래서 학생부 기록을 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고 자기소개서를 지도하고 추천서를 썼다. 면접지도, 논술지도, 적성지도를 했다. 이제는 논술도 사라지고 적성도 사라지고 추천서도 사라지고 자기소개서도 사라졌다. 그 많던 학생부 기록도 줄어서 항목별로 500자 정도이고 대학에 제공되는 학생부 기록도 줄었다. 이제는 다시 수능이 중심인 정시가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학생들도 내신보다는 수능을 더 중요하게 여겨 고3 교실에서 수업은 사라지고 각자 혼자 공부하는 공간이 되었다. 교육과정도 바뀌어서 학생 선택을 기반으로 교육과정이 운영되고 앞으로는 학점제가 도입되려고 한다. 그런 변화에 적응하거나 따라가야만 했던 지난 20년의 시간이었다.
아빠는 이제 남은 10년의 시간을 두고 정리하려고 한다. 그리고 교육 그 본질에 충실하려고 한다. 가르치고 일깨워주고 도움을 주려고 한다. 더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조력자가 되려고 한다. 가장 되고 싶은 곳은 너와 누나에게 인생의 좋은 선배가 되고 싶구나.
밤이 깊다.
내일 또 편지 쓰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