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상여가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개미처럼 느릿느릿 기어갔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훠이 훠이 훠~이...' 종구잡이가 선창하고 상여꾼이 그 말을 받았다. 길은 끝없이 멀어졌고 곡(哭)은 후줄근히 늘어졌다. 눈 쌓인 언덕배기도 가파른 비탈길도 잘만 지나던 상여가 멀쩡한 평지에 멈추고 때로는 뒷걸음질도 쳤다. 할아버지를 실은 상여는 분파 문중의 대종손으로 사람 좋은 한량으로 평생 유유자적하셨던 당신의 팔자걸음보다 훨씬 느렸다.
동짓날 저녁 이웃사촌이 보낸 팥죽 속 새알이 문제였다. 몇 수저 드시다 목에 걸렸다고 ‘임자, 물 좀...’이라는 한 마디가 할아버지의 생전 마지막 말씀이 되고 말았다. 칠순 상이나 받고 가시지 뭐 그리 급했느냐 혀를 차면서도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부음을 호상(好喪)이라고 떠들었다. 경황없이 집안 어른을 보내야 했을 가족 친지의 아쉬움은 있을지언정 병치레 없이 가셔서 본인의 고통이 즐었을 뿐 아니라 남은 가족도 편했다는 말일 게다.
차가운 흙 속에 할아버지를 묻고 돌아오던 논둑길에서 누런 삼베 상복을 걸친 아버지에게 몇 번을 머뭇대다 여쭤봤다. 멋대가리라고는 서캐만큼도 없는 아버지의 평소 말투 그대로.
“아버지도 돌아가요?”
아버지는 눈 쌓인 들판 먼 곳을 한참 쳐다보더니 짧게 대답하셨다.
“늙으면 다 죽는다.”
다? 아버지도 돌아가신다는 뜻으로 들었다. ‘왜요?’라 묻지는 못했다.
금광에서 복사 가루 들이마시며 젊은 날을 보낸 아버지는 오십 줄부터 힘들어했다. 하나도 아닌 암 세 개가 동시에 아버지를 괴롭혔고 돌아가시기 전 몇 년간은 병원을 들락거리느라 정신없었다. 집안에서는 지금도 두 분을 언급할 때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보다 훨씬 행복하셨다고 회고한다. 병치레를 겪지 않고 죽음을 맞는 것이 행복한 인생의 요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때부터 움튼 듯하다.
쉰 초반까지의 내 생활은 숱한 해외 출장과 주재원 근무로 요약된다. 휴일이 따로 없었고 공항 검색대를 내 집 대문처럼 드나들었다. 서류 가방에 넥타이 차고 비행기 트랩을 오르는 비즈니스맨이 꿈이던 시절, 그러나 입사 여섯 달 만에 떠난 첫 해외 출장에서 만사 겁 모르고 덤벼들던 청춘은 세상이 생각만큼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았다.
내 덩치보다 큰 짐 보따리 챙기는 일이 주 업무였고 비좁은 좌석에 움츠려 청하던 새우잠, 도착지 입국심사장부터 꽉 막히던 입과 귀 그리고 적응할 만하면 떠나야 하는 나그네 신세... 미리 준비한 본보기 상품을 거래처에 내려놓고 빈손으로 돌아올 때마다 허전했다. 빠진 것은 없나, 일은 마무리되었는지, 내가 갈 곳으로 가고 있는지조차 가끔 혼란스러웠다. ‘떠나다’와 ‘돌아가다’라는 낱말의 경계마저 흐릿했다.
초상 치르러 가는 여행이 즐거울 리 없는 비행기 안에서 여섯 살 큰애만 신났다. 서울에 다녀온 지 며칠 만에 비행기를 다시 타게 되었고 자리에 앉자마자 승무원 누나가 장난감을 갖다 주어 싱글벙글했으며 소고기와 닭고기 중에서 하나만 골라야 하는 고민 앞에서도 입은 함지박만 해졌다. 푹신한 빵 속에 버터와 잼까지 두텁게 발라 먹어치우고는 배를 두드리며 해맑게 끅끅댔다. 세상 걱정 모르던 그 시절로 나도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사람 북적대는 장례식장 복도와 영안실이 애들에겐 놀이터였다. 사방으로 달음박질치는 꼬마를 번번이 타이르기도 귀찮았다. 다들 지쳐 잠잠한 새벽녘, 꼬마가 졸린 눈으로 다가와 할아버지를 찾는다. 영정 아래 棺(관)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영구차로 시신을 옮기기 시작하자 애가 또 묻는다.
“아빠, 하부지 저기 있어요?”
“그래, 돌아가셨다.”
‘왜요?’라고 질문을 할까 봐 잠깐 긴장한다. 아직은 제대로 답할 말도 자신도 없다.
下棺(하관)이 시작되고 여기저기서 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른들이 한 삽씩 흙을 관 위에 뿌리자 아이가 내 바짓가랑이를 움켜잡고 펄쩍펄쩍 뛰었다. 왜 장지까지 어린애를 데려왔느냐고 어른들이 야단을 쳤다. 안 된다고, 숨 못 쉰다고, 하부지 죽는다고 관을 꺼내라던 여섯 살 꼬마는 마침내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었다. 고모와 며느리들의 마른 곡(哭)보다 처량했다.
일 년이 후딱 지났다. 첫 기일, 아이는 한 해 전 일을 다 까먹었는지, 아니면 죽음이라는 의미를 자기 방식대로 웬만큼 이해했는지 하는 짓이 많이 달라졌다. 무덤 앞에서 안녕하시냐 안부를 묻고는 자기도 한 잔 따라드리겠다며 막걸리 통을 들어 술잔을 가득 채웠다. 꼬마를 데리고 주변 선대 묘역을 한 바퀴 돌았다. 조상들께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둘러보던 아이가 중얼거린다. 돌아가시면 다 여기로 오네.
산에서 내려와 논두렁으로 접어들었다. 이십여 년 전 이곳에서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알 리 없는 꼬마가 느닷없이, 아빠도 돌아가느냐고 묻는다. 늙으면 다 죽는다던 아버지의 말씀이 혀끝을 맴도는데 뭣 때문인지 망설이며 묻지 못했던 ‘왜요?’라는 질문을 나와 달리 이 아이는 바로 던진다. 다른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서 다른 시간에 같은 얘기를 나눈다는 사실이 놀랍다. 사람이 왜 죽는지 여쭤볼 아버지는 내 곁에 없고 그의 아들은 그걸 핑계 삼아 입을 굳게 닫는다.
아버지는 그때 눈 쌓인 논바닥으로 고개를 떨구셨고 지금 나는 금방이라도 빗방울 뿌릴 듯 흐린 하늘을 올려다본다. 내 생명 다한 뒤에야 그 침묵의 실체를 알아챌 꼬마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산 중턱 아버지의 묘터로 눈을 돌린다. 떼가 잘 자라지 못해 엉성한 무덤 머리가 나도 내내 걸렸었다. 겨울 오면 하부지가 춥겠다면서 꼬마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뭘 알겠다는 걸까. 동짓달 산바람이 차갑다. 아이 손을 끌어당겨 호주머니로 집어넣었다. 작다. 포동포동한 다섯 손가락이 내 손바닥 안에서 꼼지락거린다. 아이가 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