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증(渴症)

by 문예반장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왔다. 할아버지의 장례 후 얼마 되지 않아 형님이 하던 사업에 빨간 불이 켜졌다. 고향에 남아있던 집 한 채를 정리한 돈으로 시작한 일이다. 사업 실패라는 말은 곧 집안의 몰락을 의미했다. 서울로 이사와 경제적으로 허덕이던 우리 가족은 셋방살이마저 만만치 않아 수시로 이사했다. 정릉, 길음동, 삼양동 꼭대기에서 상계동으로 옮겨갔다. 입대 전 마지막 집은 중계동 뚝방(방죽)촌이었다. 뒷문을 열면 실개천에 오물 덩어리와 잡다한 쓰레기가 악취를 풍겼다. 걱정거리 하나는 줄었다. 날짜만 되면 꼬박꼬박 연락 오던 집주인, 그래서 하루도 미룰 수 없어 온 식구가 마음 졸이던 사글세의 공포에서 드디어 벗어났다.


곤궁했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서울에 올라온 이유도 광산이 문 닫을 때가 되어서였지 아버지를 기다리는 일터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폐광하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그곳에서 일을 계속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야간 경비원 자리를 얻었다. 호불호를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저녁 7시부터 새벽까지 밤낮이 뒤바뀐 생활이 시작되었다.

곤궁함이 내게는 심리적 압박이었다. 핑계만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3학년 초부터 성적이 떨어졌다. 소위 명문대학교 합격에 비상이 걸렸다. 대학입시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한 학기, 수업이 끝나고 늦게까지 교실에 남아 공부해도 떨어진 성적은 올라가기 쉽지 않았다. 우리 집 사정을 그런대로 아시는 담임 선생님께서 비슷한 상황의 나와 친구를 교무실로 불렀다. 미리 작성해둔 입학지원서를 내놓고 물었다. 대통령 하고 싶으냐고. 장교 계급장을 달고나면 길이 보일 거라며 당장 가서 원서부터 접수하라셨다.

우리는 낄낄거리며 아무 생각 없이 태릉 육군사관학교에 가서 원서를 접수했다. 아버지는 좋아하셨다. 육사든 어디든 아들이 대학에 간다는 걸 반가워했다. 내 실력이면 어느 학교를 지원해도 붙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는 아버지였다. 학비 문제도 아버지를 편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종합격자 명단에서 나는 빠져있었다. 선대 조상 중에서 불순분자는 물론 살인이나 도둑 등의 죄목으로 교도소에 간 사람 전혀 없는데 신원조회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대통령의 탄생이 좌절되어 심각한 사람은 불합격 당사자인 내가 아니라 내 아버지였다. 누구를 만나도 아버지는 아들 얘기를, 미래 대통령의 탄생을 기정사실인 양 자랑스레 늘어놓으셨으니.


아버지는 내가 졸업한 학교에 4학년 봄 학기 등록 전과 졸업식 때 두 번 왔다. 1980년 서울의 봄 때부터 대통령은 거의 매일 죽었다. 주로 화형이었다. 수십 번을 불에 태워도 위대한 대통령은 불사신인 듯 죽지 않았다. 아버지가 갑자기 학교로 와서 나를 당황케 했던 그 날도 대통령은 도서관 정문의 시계탑 앞에서 장작불에 태워지기 직전이었다. 지푸라기로 엮어 만든 흉한 모습의 허수아비가 제단 위에 세워졌다. 매일 화형을 시켜도 살아나는 우리의 대통령, 기를 쓰며 또 죽이겠다는 학생들, 그리고 환한 봄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갈색 털외투를 걸치고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학교로 온 아버지. 그런 주변 모든 풍경이 투박하고 부조리하며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보였다.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을까, 아버지가 한 말씀 하신다.

“허구헌 날 학생들이 웬 데모냐? 하라는 공부나 하지.”

최루 가스가 눈을 찌르던 운동장으로 아버지가 245,000원을 들고 오셨던 그 날은 4학년 봄 학기 추가등록 마감 하루 전이었다. 등록금이 사십 만원 조금 넘었던 것으로 기억하니 150,000원이나 부족했는데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공부를 계속하라는 말씀이었다.

“모자라는 돈이 어디서 나오나요. 군대나 다녀오렵니다.”

봉투를 아버지에게 돌려드렸다.

“... 미안하다. 그래도 입대할 때까지 학교는 다녀야 할 거 아니냐.”

“괜찮아요. 군대 끝내고 복학하죠. 나머지 돈을 구할 방법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지쳐있었다. 입대 전까지 푹 쉰 다음 입대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이 돈은 가져가. 네 거다. 그리고 그 아가씨는? 아직도 찾는 중이냐?” 그 격동의 마당에 아버지는 나의 첫사랑을 묻는다. 짝사랑이라 불러야 마땅할 내 첫 미팅 상대. 얼굴도 본 적 없는 남의 집 딸, 고운지 똑똑한지 모를 한 여학생을 아버지는 ‘그 아가씨’라고 불렀다.

서울에서의 우리 집 형편은 말 그대로 하루살이였다. 광산 막장에서 일상적으로 부딪히던 죽음의 공포로부터는 겨우 벗어났어도 이제는 생활고라는 문제가 현실로 닥쳐왔다. 아버지의 삶은 삶이 아니라 그냥 사는 것이었다. 나는 내 나이의 젊은이가 일반적으로 겪는 고민으로 편하지 못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절망했으며 사랑과 이념의 경계에서 방황했다. 대학 일학년 초 다섯 번 만난 후에 끝났던 첫사랑은 대학 생활 내내 홍역이었다.


얘기를 끝낸 아버지가 학교 정문으로 걸어 나갔다. 내 마음이 그랬던지 그의 걸음걸이가 허탈해 보였다. 5월 꽃향기는 최루탄 냄새에 덮였고 나는 아카시아와 라일락의 향기를 기억하려 애썼다. 학교 시계탑 밑에서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갑자기 목이 멨다. 좀 전까지 옆에 있던 그가 그리워서 정류장으로 쫓아갔다. 아버지는 정류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서서 정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가 얼굴을 돌리더니 담배를 입에 물었다. 길 건너 대학촌에 가서 커피 한 잔 마셔요. 우리가 자주 가는 뒷골목 부흥집에서 소주도 한 잔 드시고요. 245,000원을 그렇게 쓰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그날이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 아버지와 둘이서만 함께 했던 마지막 시간이었다.

그날 오후 늦게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졸업여행인지 수학여행인지를 포기한 나는 바다로 떠났다. 일주일쯤 어디든지 돌아다니고 싶었다. 입대 전에 가슴 속 응어리로 남은 찌꺼기를 몽땅 털고 싶었다. 그러나 겨우 하루 만에 나는 처참하게 망가져 돌아왔다. 내 머리에 각인된 첫사랑의 여운은 나의 기억에서 빠져나갈 기미가 없었고 그의 흔적을 스스로 쫓아낼 의지마저 없음을 깨달았다. 유약한 감상의 테두리 속에서 헤매던 내 찌든 청춘과 구차한 일상만으로도 벅찼을 아버지의 고단한 세월. 그때 아버지가 짊어졌을 삶의 중압감과 내 첫사랑의 상실감을 저울에 달아보면 뭐가 더 무거웠을까? 비교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확신하는 한 가지, 나와 아버지 모두에게 삶은 갈증(渴症)이었다. 대간한 목마름이었다.


머리를 짧게 자른 입대자들이 논산행 고속버스를 꽉 메웠다. 1983년 6월 9일 아침 나는 훈련소로 떠났다. 아버지는 내가 힘들까 안타깝고 나는 아버지 등을 눌러대는 짐이 무거울까 걱정이었다. 광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 오던 날 내가 본 아버지는 든든한 기둥이었다. 그렇게 여겼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이제는 걱정되는 아버지를 남기고 다른 세상으로 내가 떠난다. 잘 다녀오라는 한 마디가 말주변 없는 아버지의 전날 밤 인사였다. 몸 건강하라던 당부의 말씀도 물론 있었다. 터미널까지 함께 가겠다던 아버지를 굳이 말리고 떠나와 그제야 버스 창 너머 바깥을 바라보며 보이지도 않는 아버지를 불러본다. 멋대가리 없기가 꼭 아버지를 닮았다. 사내 녀석이 뭔 눈물이냐며 한소리 하셨을 아버지가 벌써 그립다. 집에서 하지 못한 인사를 전한다. 다녀오겠습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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