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 아우성

by 문예반장

시골집 안팎에 꽃동산이 펼쳐졌다. 이파리 뾰족한 이것이 엉겅퀴, 이건 달맞이꽃. 민들레, 봉숭아... 내가 묻고 엄마가 이름을 대면 난 종이 위에 번호를 매기며 이름을 적어 내려간다. 군 보건소의 의사 선생님이 권유한 놀이방법이다. 백 개도 더 될 것 같다는 내 말을 엄마는 심드렁하게 받는다.

"글쎄다, 한참 세다 보면 숫자가 생각이 안 나네."

"이름이 뭔지는 아시고요?"

내 가슴팍 높이에서 빼꼼히 나를 올려다보는 엄마 눈초리가 매섭다. 이름? 모르는 줄 아느냐, 괘씸하다고 따지는 눈치다. 아니라고 엄마를 토닥이면서도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하나, 둘, 셋, 넷, 차례대로 세어가던 숫자는 중간에 잊는다면서 그 많은 풀과 꽃들 이름을 어떻게 담고 사는지, 흰 머리 풀풀 내린 둘째 아들은 내일모레 아흔 줄인 늙은 어미의 기억 방식을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씩 이름을 적어가다 보니 쉰을 넘어버렸다. 엄마와의 숫자 놀이가 따분하다. 꽃밭에 파묻힌 엄마를 놔두고 슬쩍 밖으로 나와 은행나무 밑에서 담장 주변을 바라본다. 저 많은 생명체가 언제 여기로 왔을까, 엄마가 심었는지 바람 따라 물 따라 흘러 흘러왔는지, 그리고 그 이름을 엄마는 언제 알아 어찌 외웠는지. 흠칫 놀란다. 나잖아! 갓 쉬흔을 넘고, 가끔은 따분하고, 내가 어디서 뭐 하는지 종종 궁금하고? 지금껏 살아온 나의 행적과 다를 게 뭐냐.


내 눈엔 고리타분하고 허울뿐인 왕손 집안의 종부(宗婦) 자리를 엄마는 벼슬로 여겼다. 입바른 소리로 둘째가라면 서운한 엄마였다. 촌수와 나이를 따질 것 없이 엄마의 한 마디를 피해간 집안사람은 없다고 들었다. 괄괄한 성격 그대로 누구였든 간에 상대를 몰아붙이는 종부의 독설과 고집은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마저도 엄마의 괴팍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가족 누군가가 엄마 혼내주라고 아버지더러 부추겨도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라이터돌’만한 네 엄마, 혼낼 데나 있냐?’라고.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엄마를 이긴 적 없었다. 아니, 일부러 져주셨을 것이다. 그랬던 엄마가 이제는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자꾸 혼동하신다. 늦둥이 막내가 약해빠져 걱정이라며 땅이 꺼지게 한숨이고 전화도 안 받는다고 역정을 부리신다. 몇 해 전 이른 나이로 삶을 마감한 그에게.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난 후 엄마 모시는 문제로 의견이 분분했다. 인류 역사상 자식이 부모를 모시지 않는(싫은?) 나름의 이유는 시대를 뛰어넘어 대부분 일치한다. 핏줄을 향한 본능적 애정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설 때의 귀찮음이 배경에 깔려있다. 편하고 싶다는 욕망, 그런 것. 결론을 내렸다. 친정과 시댁 중간쯤에 집을 한 채 준비해서 모시기로. 우리도 자주(?) 내려갈 수 있고 엄마는 친정 쪽 일가들이 옆에 있어 편안하실 거라며.

이듬해 봄, 떼도 아직 살아나지 않은 아버지 무덤 위에 새순 하나가 야무지게 돋아났다. 밤톨 하나가 내려앉아 추운 겨울을 나고 따듯한 봄기운을 받아 싹을 틔운 것이다. 우리는 이 나무가 아버지의 분신이라 단정했다. 손가락 크기의 새순을 뿌리째 뽑아와서 엄마 계신 시골집으로 옮겨 심고는 ‘아버지 나무’라고 이름 지었다. 서너 해가 지나자 애송이 풋밤 몇 알이 탐스럽게 열렸다. 몇 해 전 늦가을, 벼락을 동반한 거센 태풍이 밤나무 몸통을 통째로 부러뜨릴 때까지 '아버지 나무'는 잘 여문 밤을 꼬박꼬박 푸짐하게 내놨다.


작은 돌멩이로 경계를 가른 꽃밭, 돌 틈 사이로 고개를 내민 채송화가 앙증맞다. 색깔이 열 가지도 넘는 줄을 이번에 처음으로 알았다. 원체 작은 체구였지만 이젠 쪼그라들어 아이 만한 엄마가 자그마한 채송화와 겹쳐 안쓰럽다. 집 근처에서 한두 포기씩 뽑아 옮겨와 심을 때마다, 며칠 전까지 보이지 않던 풀이나 꽃이 마당 한구석에 덜렁 피어있을 때마다, 엄마는 뭔 생각을 하셨을까. 풀꽃보다 못한 애들, 다 부질없다? 어쩌면 그런 것일 수도.

늦은 봄날, 세상이 잠잠하다. 꽃과 풀은 마당 본 주인이고 새와 바람은 수시로 들락대는 손님이며 친구다, 물색없이 바쁜 자식 대신 사계절 내내 그들이 엄마의 곁을 든든히 지킨다. 담장 바깥에는 반 토막 난 밤나무가 라이터돌만한 엄마를 묵묵히 바라본다. 아홉 달 반을 품어 내놨더니 정작 당신이 보고 싶을 땐 옆에 없는 아들딸이 뭔 소용이랴. 문 열면 환하게 웃는 그들로부터 엄마는 더 많은 위안을 얻는지도 모를 일이다.

쟤들, 눈치코치 없이 피어나는 그러나 엄마 눈에는 마냥 예쁜 꽃들. 자기 좀 봐달라고, 빛깔이 곱지 않냐고, 아니, 쟤보다 잘난 자기 먼저 봐달라고 서로들 아우성인가. 무심한 것! 푼수 같은 예쁜이들! 엄마 모르게 꿀밤이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으나 아버지 생전 말씀처럼 손톱 크기 그들에겐 주먹이 닿을 구석조차 없다. 삐끗 열린 양철 대문 틈을 기웃대던 뒷집 점박이가 들어오려다가 슬그머니 뒷걸음질 친다.


사정이야 어쨌든 미안했다. 달리 보면 사시사철 화사한 꽃 속에 묻혀 사는 엄마야말로 진정 행복한 분일 거라면서 스스로 낯간지럽게 변명을 늘어놓다가 화들짝 머쓱하다. 누가 뭐래도 권력과 돈이 최고라는 요즈음 세상에서 행복이 그렇게 단순한 잣대로 결정된다면, 하루가 다르게 기억이 흐려가는 엄마가 꽃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툇마루에 엄마를 앉혀드리고 밖으로 나와 시골집을 바라본다. 지구촌 작은 나라, 충청도 오지 산골의 조그만 집, 시멘트 담과 슬레이트 지붕, 풀과 꽃... 머잖아 엄마는 꽃이 예쁜지 미운지, 피었는지 졌는지, 꽃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시나브로 잊어갈 테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신 생김새처럼 아담한 꽃밭에, 낮은 담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은 철부지들의 소리 없는 수다는 언제쯤 멈추랴. 나 죽을 때 되어 눈멀고 귀 닫히면 또 모를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갈증(渴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