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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예반장 Apr 01. 2023

해후(邂逅)

   서울, 1987년 가을; 특명이 떨어졌다. 말 많고 까다로운 모 거래처를 완전히 정리하거나 우리 조건을 관철하여 비즈니스를 계속하든가 결론을 내리라는 지시였다. 그 회사 입구에서 건물로 들어서는 한 여자를 봤다. 머리끝만 살아있는 웨이브, 커다란 호보 가죽 가방과 이마 위에 걸친 선글라스가 차분했다. 저 여자가 오늘 만날 사람이면 그 회사와의 거래는 계속될 거라는 확신이 밑도 끝도 없이 꿈틀했다.

   홍콩 카이탁 공항, 1999년 겨울; 업무상의 식사 자리까지 피하던 그가 웬일로 그날은 내리자마자 가볍게 한 잔까지 제안했다. 나중에 알았다. 복잡한 일 이야기나 머리 아픈 술보다 노래나 부르며 쉬고 싶었다는 것을. 일본식 가라오케 클럽의 한국인 마담이 화들짝 반긴다. 새끼손가락을 치켜들며 눈을 찡긋한다. 술 취한 것도 아니면서 그는 ‘그리움만 쌓이네’를 세 번이나 불렀다. 평소의 그와는 달라 보여 적잖이 당황했으나 이유를 묻지 않았다.    

   구룡반도, 1999년 겨울 같은 날; 새벽 1시가 지났어도 침사츄이 중심가는 활기가 넘쳤다. 천년 주기 밀레니엄 앞에서 종말론이 흉흉하다.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자포자기와 그럴 일 없다는 낙관 속에 새천년을 맞는 절망과 희망이 뒤섞여 혼란스럽다. Kowloon 호텔, 차에서 내린 그가 내 등을 토닥거리며 어깨를 안아준다. “고마워요... 오늘 모든 것.”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하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고마운 건 난데.  

   

   틀림없이 그였다. 옆모습이 서너 해 전 홍콩에서보다 통통해 보였으나 짙은 선글라스와 파마 웨이브가 확실한 증거였다. 탑승구 앞 의자에 앉아 일반 핸드폰과 다른 기기를 계속 두드리고 있었다. 여행은 사람을 풀어지게 한다. 쓸데없는 실수는 금물, 멀리 떨어져 살피며 한참을 서성거렸다. 얼굴을 들고 잠깐쯤 쉴 법도 하건만 겹쳐 꼰 다리조차 풀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들어 선글라스를 올리며 눈을 깜박이는 그 얼굴이 환하게 웃는다. 다행이었다. 내가 생각한 그 사람이었고, 내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반가웠다. 누군가를 통해 내 소식을 들었고 나를 찾고 있었다는 말. 최소한 내가 그의 여행길에서 내키지 않게 마주친 불청객은 아닌 듯해서 마음이 놓였다.

   시간이 많지 않다. 그는 바로 떠날 사람이고 난 금방 도착했다. 만날 약속을 잡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금방 올 거예요. 한두 주 정도? 출발 전에 미리 연락 드릴게.”

그가 먼저 탑승구 안으로 총총 사라졌다. 나는? 공장으로 가야지. 밤이면 텅텅 비는 기숙사로. 공항 청사를 빠져나온다. 하늘이 까맣다. 비가 올라나.


   10월 말부터 일찌감치 찬 기운이 맴돌았다. 새벽녘 어스름을 헤쳐 빛나는 햇살이 기숙사 창문을 거쳐 방안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담장 옆 대로변을 달려보겠노라고 결심한 첫날, 운동복을 갖춰 입고 밖으로 나선다. 꽁꽁 얼어 미끄러운 철계단을 내려가기 쉽지 않고 새벽 찬바람도 까칠하게 나를 막는다. 나가려던 생각이 쏙 들어간다. 방으로 돌아왔다. 그가 있는 곳, 위도상 칭다오와 비슷한 바다 건너 서울은 훨씬 더 춥겠다. 내일은 그가 오는 날이다.     

   이 동네에서는 보기 힘들다는 눈이 늦은 밤부터 세상을 하얗게 도배했다. 경비일 보는 한족 아저씨 말을 빌자면 몇 년 만에 처음이랬다. 내일 도착할 손님을 맞이하는 반가운 첫눈인지 아니면 지난번 해후(邂逅)를 시기하는 심술인지 밤새 내렸다. 야간 근무조 직원들이 휴식 시간 동안 공장 마당으로 뛰쳐나와 강아지처럼 펄쩍펄쩍 뛰어다녔고 한쪽에서는 공장 주변의 눈을 치우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오전 열 시 도착 예정 비행기는 연착을 거듭하다가 저녁 8시쯤 내렸다. 전화벨이 울렸다. 입국 심사대 앞에서 기다리는 중이라며 전화기 저쪽에서 그가 속사포처럼 내뱉는다.

   “온종일 굶었어요. 사람을 비행기에 가둬놓고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야. 그리고 왜 하필 오늘이람! 하늘도 비행기도 다 미쳤나 봐. 배고파 죽겠어요. 뭐라도 먹으러 가죠.”

된장찌개, 파전, 갈비찜 그리고 소면 한 그릇까지 남김없이 비우고 나서야 얼굴이 편안하다.

   “실내 장식이 따듯하네요.” 맛있게 먹었다는 인사였다. 그가 머무는 호텔 앞에 도착했다. 종일 피곤했던 그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깊은 잠일 것이다.


   다음 날 막 비행기로 떠난 그녀가 서울에서 블랙베리로 메일을 보내왔다.

   “I am on my way home by bus. Seoul makes me comfortable.

   Want to thank you for all during my stay in Qingdao. Take care.”

검은 창문에 하얗게 김이 서린다. 하루 전 눈보라에 이어 강추위가 몰려왔다. 그의 눈만큼 커다란 함박눈이 또 쏟아진다. 산을 넘어온 바닷바람까지 창을 흔들어댄다. 그제도 추웠나. 답장이 객쩍다.

   “거기 춥다던데, 이불 잘 덮고 주무셔야겠다.”     

   하루하루가 모여 계절이 바뀌고 다시 일 년이 지났다. 겨울이 채 가기도 전에 다음 철을 기다린다. 그런 사람이 어디 나 혼자뿐일까. 2층 작은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그림자가 매일 조금씩 짧아진다. 얼굴에서 허리로 그리고 기어코 발밑까지 내려간다. 게으른 봄날도 그렇게 다가오려나. 졸린 눈을 비빈다. 미운 햇살이 침대 발치로 툭툭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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