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꽃샘추위가 찾아왔다. 두꺼운 겨울옷 몇 벌 남겨두길 잘했지. 차가워진 날씨에 뭘 입을까 머뭇거리다 눈 닿은 바깥마당에 눈이 그득하다. 벚꽃. 바람에 날려 차창을 뒤덮은. 한 해 전 5월엔 스러진 저 꽃잎처럼 한 시인이 세상을 떠났고 또 다른 오월 그때는 서울 한복판이 최루가스로 매콤했다. 완전무장한 전투경찰과 그들의 적수가 될 수 없던 시위대가 서로 쫓고 쫓기었다. 1980년 5월 15일 종로 관철동 뒷골목에서 그게 뭔지 정확히 모르는 나도 민주화는 꼭 이뤄야 할 시대적 요청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김지하의 시 한 편이 결기의 배경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시절, 지금 돌아보면 완전히 비정상이었던 당시의 현실을 비판하고 민주주의 열망을 노래한 시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이다. 군사정권하에서 금지되었다가 1982년 김지하의 시집 '타는 목마름'에 수록되었으나 이것마저도 최규하 대통령의 뒤를 이은 전두환 정권에 의해 금서(禁書)로 묶인다. 운동권 노래로 만들어져 1980년대 반정부 시위가 한창이던 대학가에서 '민주화의 상징'으로 통했다.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숨죽여 흐느끼며/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어두운 새벽, 정보기관의 눈을 피해 정권을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인 후 누군가한테 붙잡힐까 무서워 허둥지둥 도망치던 시대의 암울함을 묘사했다.
1970년대 그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곧 국가 운영체제의 기반이던 박정희 시절, ‘사상계’에 ‘오적’을 게재해 독재 정부를 비판했다는 죄목으로 100일간 수감, 1974년에 민청학련사건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10개월 만에 풀려나서 유신 독재의 진상을 알리는 글을 또 쓰고 잡혀 6년 그리고 민청학련사건과 오적 필화사건 등으로 7년 넘게 교도소에 머물렀다.
1970년대 「오적」과 1975년 작 「타는 목마름으로」 두 편의 시로 김지하는 독재에 항거한 지식인 반열에 올랐다. 노벨평화상과 노벨문학상 후보에 추천될 정도로 그의 평판은 높았으나 세상이 그에게 마냥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변절자를 넘어 전향자라는 낙인이 따라붙었다. 사전상의 변절은 올바른 절개나 지조를 지키지 않고 바꾼다는, 즉 사상이나 이념과는 별개로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이며, 전향은 종래의 주장이나 이념을 자기 소신에 따라 (주로 반대 방향으로) 바꾸어 돌린다는 뜻이다.
1991년 강경대 치사사건을 시작으로 분신자살이 유행처럼 번질 때 그는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쓴다. 운동권에서 나이 어린 학생을 열사라는 호칭으로 추켜세우고 대규모 장례를 치러주며 자살로 조장한다고 작심 비판한다. 이 사건은 90년대 민주화 운동의 변곡점이 되었으며 운동권은 그의 행위를 배신이라고 공격하는데 변절자이자 배신자로 몰린 김지하는 결국 문단에서 제명된다.
김지하의 이런 태도 변화는 나중에 그의 인터뷰를 보면 이유를 대략 알 수 있다. 70년대 후반 옥살이하는 동안 좌파 동료들이 수시로 순교를 권유했다고 한다. 민주화의 성전에 바칠 제물로써 김지하를 죽음으로 몰아가려고 했다. 김지하가 이를 거부하면서 운동권에서는 그를 집단적으로 따돌리고 매도하기 시작했다. 본인과 그의 가족, 주변 인물까지 오랫동안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변절 딱지는 점점 견고하게 굳어져 갔다.
작가의 언행 변화가 변절이냐 전향이냐 하는 문제는 좌우와 보수 진보로 나뉜 대한민국의 이념 투쟁이 계속되는 한 앞으로도 줄곧 쟁점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정치와 문학을 별개로 보는 시각, 정치적인 배경을 이용해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고 하지 않는 순수한 작가의 태도 그리고 문학이나 작가를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위정자들의 냉정함이 절실하다. 문학이 이념적 잣대에 휘둘리지 않고 문학 자체로만 존재할 때 문학의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차라리 나만의 착각이기를 바란다.
문학의 기능과 역할을 논할 때 반드시 따라붙는 화두가 현실 참여이며 글이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는 써질 수 없다는 면에서 문학은 가상적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적이며 논리적인 허구를 엮어 작가는 자신의 이념과 주장을 문장 속에 심는다. 순수문학이라 불리는 글들도 이념적 성분이 완전히 배제되었다고 주장하기 쉽지 않다. 정도의 그리고 표현 방식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웬만한 글은 작품 안에 이념적인 요소를 이미 잉태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게 비판적 관점을 가진 작가라는 부류의 기본적 속성이든 아니면 의도적 계산이든 간에.
민주화를 부르짖던 김지하가 자신의 동지들로부터 반민주적인 글이라고 난타당했던 현실을 돌아보며, 영원한 진리는 없는 건지, 상황 논리에 따라 사람이 진리의 기준을 바꾸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진보도 보수도 아니라던 그의 주장을 문학은 문학 자체로만 보아야 문학답다는 순수문학적 관점에 따라 그냥 넘길 것인가, 이전 대비 민주화가 많이 달성된(?) 특정 시점까지 예전의 동지를 설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난할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지금은 4월, 김지하의 1주기가 곧 다가온다. 간밤 내 봄 가뭄을 부분적으로나마 해갈시킨 단비가 강풍까지 동반했다. 타오르는 울분을 주체못해 속에서만 맴돌던 그의 목마름이 시원한 비바람을 찾아 나섰을까. 윤이월 눈꽃이 되어 길바닥을 헤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