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게으르다. 오는 듯 마는 듯 멈칫거린다. 밤에는 춥고 낮엔 후끈한 날씨 탓일 것이다. 새벽녘 뒤창을 여는 순간 초록 풀 위 하얀 꽃 무리가 점점이 떠 있다. 그러면 그렇지, 기다란 꽃대 위에 매달려 하얗게 뒤뜰을 도배했다. 봄답지 않은 추위 탓에 거들떠볼 생각조차 접은 텃밭이 술렁거린다. 하룻밤 만에도 겨울은 온댔다. 봄도 마찬가지고 꽃도 그럴 것이다.
눈(雪)이 말랐다. 가뭄을 해갈시킬 우중충한 겨울비 몇 방울 내릴 기미 없이 예년 겨울보다 따듯하고 봄보다는 추운 날이 이어졌다. 대단히 덥거나 춥기만 할 뿐 물 부족 현상이 해결될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삼한사온과 뚜렷한 사계절 구분이라는 우리나라 기후의 특성은 조만간 교과서에서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그러거나 말거나 꾸물대더라도 시간은 흐르는 것, 새로운 계절이 흰민들레를 앞세워 내 앞에 나타났다.
몇 해 전 봄 현리를 거쳐 명지산 자락 서쪽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운악리 가는 길, 스무 살 무렵 흙먼지 풀풀 날리던 삭막한 풍경은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라는 점이 되레 낯설었다. 게다가 차를 타고 가는 여행 아닌가, 발목 아프게 걸을 필요 없어 편안했다. 여행지나 목적을 정하지 않고 떠나 무작정 걷다 달리다 쉬다 아무 버스나 집어 탔던 그때와는 다르게 떠나온 이유가 분명한 일정이었다.
무지 멀었다. 직선으로 오십 킬로 내외일 거리를 산과 들과 강에 막혀 빙빙 돌았다. 자칭 민들레 도사라던 오십 후반의 사내는 목소리로 추정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옆눈으로 나를 살피면서 돈 가지고 흥정하던 품으로 볼 때 도사는커녕 일개 장사치에 불과했다. 하기야 나도 흰민들레를 찾아 나선 사람이라 가격 가지고 시비 걸 입장은 아니었으나 예상보다 엄청 비싼 민들레 모종이 뒤 칸 트렁크에서 푹 퍼져버릴까가 더 걱정이었다.
뜰 안 빈자리를 찾아 민들레를 심었다. 한쪽엔 아예 다섯 평쯤 할애하여 민들레꽃 단지를 만들었다. 기껏해야 이틀쯤 꽃을 피우고는 솜털 뭉치 안에다 씨를 키우는 민들레다. 반드시 같은 색의 다른 개체라야만 교배가 이뤄지며 노란 민들레보다 번식 속도가 훨씬 느려 시간이 갈수록 숫자가 줄어든다. 걱정한 대로 여름 지나 늦가을까지 살아남은 흰 민들레는 겨우 다섯 주뿐이었다. 내 허술한 재배 솜씨도 개체 수 대량 감소의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해가 바뀌었다. 띄엄띄엄 늘어선 민들레의 행색이 꾀죄죄했다. 그렇게 보였다. 숫자가 적어 아쉽고 질긴 생명이라 애처로웠으며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미안했다. 그나마도 새벽에 핀 꽃이 점심 때쯤에는 바람에 실려 간다. 어디든 좋으니 자리 잡아 사방에 씨나 잘 퍼뜨리라고 부탁한다. 하루 한 번은 뜰 안팎을 돌면서 아무런 잘못 없는 노란 민들레를 눈에 보이는 족족 뽑아 버렸다. 인정사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이.
서너 해가 흘러가 다섯 송이만 살아남았다. 민들레 주변에 거름을 뿌리고 뜰 안의 적이라 할 노란 민들레를 뽑아주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작물 재배 경험이 전혀 없는 주인을 만나 힘들었을지 몰라도 자기들 편을 들어주는 나를 보고 힘을 얻었을까, 지난 몇 해 그들이 보여준 생명력은 놀라웠다. 살아남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대견한 판에 엄청난 속도로 수를 불려가다니. 그러나 기쁨은 순간이었고 절망에 가까운 실망의 시간이 닥쳐왔다.
이태 넘도록 흰민들레는 텃밭에서 자취를 감췄고 눈치 없기로 놀부 동생 흥부를 뺨치고도 남을 노란 민들레가 슬며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로써 흙 속에 파묻힌 흰민들레는 끝장인가 안타까웠는데 해가 바뀌고 봄이 되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쌓인 흙을 밀쳐낸 하얀 꽃이 땅 위로 올라왔다. 꽃도 줄기도 여리기만 했던 하얀 민들레의 질긴 생명력의 근원은 무엇인지 아둔한 내 머리로 헤아리기 쉽지 않다.
반면 노란 민들레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집주인까지 가세하여 텃세를 부렸기 때문일까, 하얀 민들레가 스스로 힘을 키웠을까. 가만 놔둬도 앞마당 시멘트 틈새까지 온통 흰민들레가 차지했다. 뒤뜰로 나선다. 봄 채소 심을 시기가 다가온다. 노랑도 생물이다. 그렇다고 하양을 버려? 쌈 종류 심을 공간 마련하려고 하양을 없애자고? 안 된다. 차라리 알량한 밭농사를 포기하는 게 낫지. 나 한가한 봄날, 노란 애들만 짜증 왕창 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