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돈 사만 원이 뚝 떨어졌다. 책 쪽 수를 고려하면 만 이천 원 정도인데 내용을 잘 모르는 총무께서 수강생 다섯에게 대뜸 이만 원씩 보내라고 전했다. 강습비 아닌 예상치 않은 수입이 생겨 당황했으나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틈이 없었다. 어딜 가나 대놓고 벌어지는 수많은 도둑질에 비하면 그 정도야 괜찮다고 넘겼는데 뭔가 켕긴다. 원래 내 돈이 아닌 데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줄기차게 떠들던 나 아닌가.
일해서 버는 것, 남 돈을 훔치는 것과 남이 내 돈을 가져가지 못하게 지키는 것 세 가지를 돈 버는 방법으로 요약한 이는 이동걸 교수다. 그 사만 원은 투자나 도둑질이 아니었다. 주식, 부동산, 비트코인 등 소위 ‘영끌투자’나 일확천금을 꿈꾸는 복권과도 다르다. 어쩌다 어영부영 굴러들어온 수익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영어 수업 교재를 정리 편집 제본한 비용 외에 추가로 이익을 붙일 명분이 없는 가욋돈이라 셋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뒷맛이 개운치 않다.
점심시간 지난 별 다방에 인파가 북적인다. 차에 앉아 음료를 주문하고 받는 시스템 덕에 매장 내 고객 숫자는 줄었으나 이제는 얘기가 다르다. 삼 년 넘도록 공공장소의 모임에 대해 풀기와 조이기가 거듭되었다. 일반인의 인내도 한계치를 훌쩍 넘었고 코로나 치사율이 낮아진 탓인지 경계심도 느슨해졌다. 차 세울 곳이 없거니와 앞뒤로 막혀 꼼작 못한 채 십여 분 넘게 기다렸다. 다행히 주차해 있던 차 한 대가 시동을 건다. 망설임 없이 페달을 밟는다.
조수석 뒤에 살짝 부딪는 소리가 들린다. 옆을 좀 살필걸. 가벼운 접촉사고라 얘기 끝에 경찰과 보험사에 알리지 말고 각자 해결하기로 합의했다. 문고리가 찌그러졌고 손잡이 아래가 살짝 긁혔다.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십만 원은 절대 넘지 않을 것, 이것보다 아래 금액으로 해결되면 그야말로 원더풀이고. 부품값이야 일정할 테니 수선비 액수가 관건이겠다. 진짜로 해결해야 할 골치 아픈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면 H 사 정비소로 가지 말고 멀리 카센터에서 감쪽같이 아내 모르게 순식간에 처리해야 한다. 덤벙대다 또 사고를 쳤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말만 말고 차분하자고 다짐한 것이 대체 몇 번인가. 제풀에 열 받아 속이 끓는다. 친구가 추천해준 수리점 몇 업체 중 하나를 택했다. 쓸데없이 사고 치는 바람에 쓰지 않아도 될 돈이 나가게 됐네. 견적이나 싸게 나오기를 기대하자.
정비소 사장과의 기 싸움은 예상보다 싱겁게 끝났다. 거기 단골인 내 친구의 전화를 받은 사장이 곤란한 사정을 듣고서 가격 낮출 대안을 알려줬다. 시내 대리점에 가서 필요한 부품을 직접 가져오면 수리비는 만 원만 받겠다는 말과 함께 부품 예약까지 해주었다. 심부름 값을 빼주는 게 당연한데 거저이기나 한 듯 좋다. 청구서 금액이 삼만사천 원이니 수리비까지 합쳐 총비용은 4만 4천 원이다.
작업장 구석 사무실로 들어가 온수통 옆 커피믹스 봉지를 집어 든다. 커피 원산지가 아닌 나라에서 만들어 세계인의 사랑을 차지한 기호품, 외국에서 ‘한국 차(茶)’나 ‘스틱(stick)’이라 부른다는 제품이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믹스를 대단히 사랑하여 한때는 하루 여섯 잔씩이나 마셨다. 정신이 맑아지고 기운이 난다 했다. ‘EASY CUT’ 두 단어가 보인다. 글자 아래 점선 양 끝을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긴다. 영어를 모르던 엄마도 그렇게 봉투를 뜯었을 것이다.
봉투가 뜯어졌다. 아주 쉽게... 문제가 뭐든 오늘은 술술 풀린다. 운수 좋은 날인가. 분말을 종이컵에 붓고 온수 꼭지를 눌러 반쯤 물을 채운다.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훌훌 저어 한 모금 마시려는 순간 밖에서 사장님 목소리가 들려온다. “끝났어요!” 오 분도 안 됐는데? 두 시간 넘게 가슴 조이던 나를 웃게 만드는 한마디가 다시 이어진다. “사만 원만 내요, 산수 편하게.” 군말 없이 만 원짜리 네 장을 내려놓고 부랴부랴 자리를 떴다.
입금 확인 겸 은행에 갔다. ATM 명세서에 이만 원씩 다섯 번, 십만 원이 확실히 찍혔다. 평소 지론대로라면 그들에게 돌려줘야 했을 우수리 사만 원이 요긴하게 수리비로 전용되었다. 나쁜 짓 해서 생긴 돈이 아니고 체면 상한 일도 없으며, 급한 상황도 웬만큼 마무리된 듯한데 켕긴다. 아내한테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이 찝찝함을 설명하기 어렵다. 잠깐 생각해보니 답이 금방 나온다.
EASY CUT은 거저 아닌 원가에 이미 반영된 편리함일 뿐이다. 공돈 사만 원은 카센터로 흘러갔다. 내 몫이 아닌 것을 향한 순간의 양심 불량, 미안함과 갈등으로 소비된 시간은 회수 불가능이다. 불기(不欺), 입적한 성철 스님께서 생전 애지중지했다던 화두가 때맞춰 떠오른다. 세상을 다 속여도 마음 속(自心)까지 속일 수는 없을 것, 잔머리 굴려 사실을 감추려던 대상은 아내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음을 비로소 알아챈다. 세상에 공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