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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예반장 Oct 21. 2023

그해 겨울, 미운 햇살

   10월 말부터 일찌감치 찬 기운이 맴돌았다. 새벽녘 어스름을 헤쳐 빛나는 햇살이 기숙사 창문을 뚫고 방안 깊숙이 들어왔다. 담장 옆 대로변을 달려보겠다고 결심한 첫날, 운동복을 갖춰 입고 밖으로 나선다. 꽁꽁 얼어 미끄러운 철계단을 내려가기 쉽지 않고 새벽 찬바람도 까칠하게 내 앞을 막는다. 밖에 나가려던 생각이 쏙 들어간다. 방으로 돌아왔다. 그가 있는 곳, 위도상 칭다오와 비슷한 바다 건너 서울은 훨씬 더 춥겠지. 내일은 그가 오는 날이다.     


   서울, 1987년 겨울; 특명이 떨어졌다. 말 많고 까다로운 모 거래처를 완전히 정리하거나 우리 조건을 관철하여 거래를 계속하든가 결론을 내리라는 지시를 받고 거래처를 찾아갔다. 주차장에서 차를 내린 여자가 앞에서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출렁대는 웨이브, 커다란 호보 가죽 가방과 이마 위에 걸친 선글라스가 꽤 인상 깊었다. 저 사람이 오늘 만나볼 사람이라면 그 회사와의 거래는 계속될 거라는 확신이 밑도 끝도 없이 꿈틀했다.

   홍콩 카이탁 공항, 1999년 겨울; 업무상의 식사 자리도 마다하던 그녀가 웬일로 도착하자마자 가볍게 한 잔까지 제안한다. 복잡한 업무나 머리 아픈 술보다 그냥 쉬고 싶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일본식 가라오케 클럽의 한국 마담이 화들짝 반긴다. 새끼손가락을 치켜들며 눈을 찡긋한다. 맥주 한 잔 앞에 놓고 ‘그리움만 쌓이네’를 그녀는 세 번이나 불렀다. 평소와 달라 보여 적잖이 당황했으나 이유를 물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구룡반도, 1999년 겨울 같은 날 자정; 침사츄이 중심가는 여전히 휘황찬란하다. 천년 주기 밀레니엄 앞에서 세기말적인 종말론이 흉흉하다.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자포자기와 그럴 일 없다는 낙관 속에 강남 크기나 될까, 작은 도시국가가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채 요동친다. Kowloon 호텔 앞에서 그가 내 등을 토닥거리며 어깨를 안아준다. “고마워요... 오늘 모든 것.” 고마운 건 난데.     


   틀림없이 그였다. 옆모습이 칠팔 년 전 홍콩에서보다 더 통통해 보일 뿐 짙은 선글라스와 파마 웨이브를 보면서 확신했다. 탑승구 앞 의자에 앉아 핸드폰과는 다른 처음 보는 기기를 계속 두드리고 있었다. 여행은 사람을 풀어지게 만든다. 쓸데없는 실수는 금물, 멀리 떨어져 살펴보며 한참을 서성댔다. 얼굴을 들어 피곤한 눈을 잠깐 쉴 법도 하건만 겹쳐 꼰 다리조차 풀지 않고 석고상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이름을 불렀다. 선글라스를 들어 올리며 눈을 깜박이는 그 얼굴이 환하게 웃는다. 다행이었다. 내가 생각한 그 사람이고, 내 이름을 정확히 기억했으며 무엇보다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나를 편하게 만들었다. 누군가로부터 내 소식을 들었으며 나를 찾고 싶었다는 말. 내가 내키지 않게 그와 마주친 불청객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그는 바로 떠날 사람이고 난 금방 도착했다. 만날 약속을 잡고 자시고 할 여지가 없다.

   “금방 올 거예요. 한두 주 정도? 출발 전에 미리 연락 드릴게.” 

그가 먼저 탑승구 안으로 사라졌다. 나도 가야지. 공항 청사를 빠져나온다. 지금쯤 기숙사는 텅텅 비어있을 것이다. 하늘이 까맣다. 비가 올라나.  

    

   그 동네에서는 보기 힘들다는 눈이 늦은 밤부터 온 세상을 하얗게 도배했다. 경비일 보는 한족 아저씨 말을 빌자면 몇 년 만에 처음이라 했다. 내일 도착할 손님을 맞이하는 반가운 첫눈인지 아니면 지난번의 해후(邂逅)를 시기하는 심술인지 밤새 내렸다. 야간 근무조 직원들이 휴식 시간 동안 마당으로 뛰쳐나와 강아지처럼 펄떡펄떡 뛰어다니고 한쪽에서는 공장 주변의 눈을 치우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오전 열 시 도착 예정 비행기는 연착을 거듭하더니 저녁 8시쯤 내렸다. 전화벨이 울린다. 입국 심사대 앞에서 기다리는 중이라며 전화기 저쪽에서 그녀가 속사포처럼 내뱉는다.

   “온종일 굶었어요. 사람을 비행기에 가둬놓고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야. 그리고 왜 이런 일이 하필 오늘이람! 하늘도 비행기도 다 미쳤나 봐. 배고파 죽겠어. 우선 뭐라도 먹어요.”

된장찌개, 파전, 갈비찜 그리고 소면 한 그릇까지 남김없이 비우고 나서야 표정이 느긋하다.

   “실내 장식이 따듯하네요.” 맛있게 먹었다는 그녀만의 인사법이다. 그가 머무는 숙소까지 배웅했다. 그녀가 정녕 필요한 것은 잠, 호텔 정문으로 향하는 그녀의 어깨가 축 처졌다.

   다음 날 막 비행기로 떠난 그녀가 서울에 도착하여 블랙베리로 메일을 보내왔다.

   “I am on my way home by airport limousine. Seoul makes me comfortable. Want to thank you for all during my stay in Qingdao. Take care.”

시꺼먼 창문에 하얗게 김이 서린다. 하루 전 눈보라에 이어 강추위도 몰려왔다. 그의 눈만큼 커다란 함박눈이 퍼붓더니 먼 산 넘어온 바닷바람까지 창을 흔들어댄다. 그저께도 추웠었지. 보내기를 누르고 보니 답장이 객쩍다.

   “서울은 춥다던데, 이불 잘 덮고 주무세요.”     


   하루하루가 모여 계절이 바뀌고 다시 일 년이 지나갔다. 겨울이 한참인데 나는 어쩌자고 다음 철을 기다리는지. 나만 그런가.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그림자가 매일 조금씩 짧아진다. 얼굴에서 허리로 그리고 기어코 발아래까지 내려간다. 게으른 봄날이 야금야금 그렇게 오는 중인지도 모를 일이다. 졸린 눈을 비빈다. 미운 햇살이 침대 발치로 툭툭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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