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웃는다
후덥지근하다. 휴일 오후 별다방 더위가 겉옷을 벗게 만든다. 두 주 넘게 맹추위가 기승을 부렸으나 실내 온도는 되레 더웠다. 긴 연휴에 지친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줄지어 몰려온다. 갓난아기부터 한 무리의 꼬마들이 매장에서 뛰어노느라 소란스럽다. 아빠와 엄마,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2층 홀은 순식간에 아이들 놀이터로 변했다. 그 중의 한 여자애가 내 앞으로 자꾸 얼굴을 들이민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서너 살쯤 됐을까. 어쩌다 눈 마주치면 고개를 홱 돌리고. 내가 멋있냐! 설마~
면 단위 시골 학교에서 점심 도시락을 가져오는 아이는 몇 명 되지 않았다. 점심시간 전 4교시는 붕 뜬 듯 항상 어수선했다. 배고플 시간, 급식차가 언제나 올지 기다리며 목이 길어졌다. 황톳길을 털털거리며 달려온 삼륜차가 시골 촌구석 향나무 담장 끝 정문을 지나 운동장으로 들어온다. 뽀얀 흙먼지가 뒤따라온다. 바퀴 소리만 듣고도 빵 배달차인 줄 안다. 창문 옆자리에 앉은 애가 낮은 목소리로 알린다. ‘왔다.’ 이제나저제나 그 순간만을 기다린 애들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진다. 점심 걱정 사라져 행복해진 애들이 활짝 웃는다.
서울로 이사를 와도 곤궁하긴 마찬가지였다. 토요일 날 오후 외할머니댁에 다녀오신다며 엄마가 백 원을 주셨다.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일찍 올 것이니 동생 잘 데리고 있으라는 당부와 함께. 머릿속에선 그 돈으로 뭘 할지만 생각했다. 동생과 내가 의견일치를 보기까지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라면 6개를 끓여 마음껏 먹기로. 찬장 위 밥그릇까지 깡그리 해치웠다. 그리고 우리 둘은 다음날까지 화장실을 끊임없이 들락댔다. 한동안 뭐가 그렇게 좋은지 눈만 마주쳐도 낄낄대고 웃었다.
지난 몇 년 지중해와 흑해 연안의 몇 나라 간 쌈박질로 전 세계가 소란스럽다. 전쟁 소식을 보도하는 외국 뉴스에서 종종 들리는 문구가 ‘at least’와 ‘ceasefire’, ‘최소한’ ~명이 죽었다든가 등의 ‘휴전’ 관련 기사이다. 제발 전쟁 그만하라는 외침인데 공허하다. 방송 내내 TV 화면에 잡힌 어떤 아이도 웃지 않는다. 앙상한 몰골과 찡그린 얼굴만 그득하다. 아무리 전쟁통 세상이라지만 죄 없는 아이들까지 피해를 받으면 안 되는데. 지구촌 단위의 대승적 결단이 없는 한 그곳 아이들이 웃을 일은 당분간 없을 듯하다.
아이들이 운다. 배고프다고 울고, 아파서 무서워서 심심해서 얻어맞아서, 혼나거나 미움을 받아도 운다. 요컨대 그 반대일 경우에 아이는 웃는다는 말이다. 갓난아기는 울거나 웃거나 중의 하나로 기분과 감정을 표현한다. 좋으면 깔깔대고 싫으면 짜증 낸다. 복잡하게 잔머리를 굴리지 않는다. 이것저것 따질 능력이 없고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몰라, 아이들은 울든지 웃든지 둘 중 하나로만 외부와 소통한다.
조금씩 커가면서 아이는 사고의 폭을 넓히고 감정을 조절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배려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비난이 따르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긴다는 점을 배우기 때문이다. 무작정 싫다고 징징대거나 좋다고 헤헤거리면 남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다. 그렇게 보면 아이 티를 벗고 어른스러워진다는 점이 꼭 바람직하고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말이라는 소통 방법을 배우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오사다 히로시라는 일본 작가가 ‘아이는 웃는다’에서 서술한 내용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는 우는 것을 배우고, 그치는 걸 배우고, 잠자는 것도 배우고, 사람 얼굴 들여다보는 걸 배운다고. 그다음에 웃는 걸 배우게 되는데, 웃는다는 것은 행위라기보다 처음으로 배우는 말이라 한다. 그리고 말을 배우게 되는 순간, 얻는 것보다 잃어버리는 것이 훨씬 더 많다고 단언한다. 배운 말만큼의 슬픔을 알게 된다는, 그래서 잃을 것 중 가장 큰 것이 ‘행복’이라고 주장한다. 웃음을 알게 되어 행복을 잃는다는 말은 일반적 통념과는 거리가 멀지만 새겨들을 가치는 충분하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지식을 얻고 표현의 묘미를 깨우친다. 뭔가를 아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말하기 전에 내용을 먼저 다듬는다. 자기의 말을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기분이 언짢지는 않을지,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는 할지 등을 본능적으로 따진다. 울거나 웃거나 중에서 골랐을 의사 표현 방식이 설명으로 바뀐다. 해맑다든가 순수하다는 면은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다. 철이 들어 세상을 안다는 말 속에 숨어있는 부정적 단면이며 ‘어린이는 어른의 어른’이라는 격언의 단서이기도 하다.
귀여운 꼬마 숙녀가 다시 왔다. 이번엔 아예 멈춰선 채 나를 빤히 쳐다본다. 슬쩍 옆으로 옮겨가는 아이 눈동자가 컴퓨터 옆에 놓인 초코칩에서 맘춘다. 그랬구나. 나도 참 눈치 꽝이네. 과자를 내밀었다. 멈칫하다 잠깐 제 엄마를 바라보고는 다시 얼굴을 돌려 나와 눈을 맞춘다.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네 거야. 두 손 내미는 애를 보며 엄마는 민망하고, 그것 상관없이 과자를 손에 넣은 꼬마는 웃는다. 그럼, 그래야 아이지! 얼굴이 환하다. 옛날 흙먼지 날리며 달려온 빵차 소식 한마디에 술렁대던 어릴 적 시골 학교 아이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