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인사를 반갑게 받아야 할 그의 말투가 심드렁했다. 남들은 부러워하는 대기업 임원 자리를 일 년 더 보장받은 친구가, 임원이란, 회장 한 마디에 목숨이 간당거리는 임시직원일 뿐이라고 한탄한다. 살아남은 것만도 다행이지 일 년 후를 걱정해? 얘, 아직 배가 불렀다.
그 푸념이 국내 유수 기업의 중역이자 상위 1% 고액 연봉자인 남자의 배부른 타령만은 아니었다. 평균 수명 아흔 시대를 열어가는 의학의 발전과 어설픈 고용행정을 그는 동시에 비판했다. 최소 십 년은 더 일할 사람을 대놓고 유령인간 취급하는 직원들의 태도에 화나고 자기 없이도 조직은 굴러갈 거라는 생각에 서글퍼지며 세상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책 없이 생명만 연장시키는 의학의 발전이 굳이 필요하냐고 묻는다. 회사가 등을 떠밀어낼 마지막 순간까지 꿋꿋하게 버텨볼 뻔뻔함도 비굴함도 바닥났다며 고개를 숙인다.
순전히 호기심이었다. 담치기용 화훼를 보러 갔다가 계획에 없었던 사과나무 한 그루를 덜렁 싣고 왔다. 할아버지 생전 시골집 안팎에는 밤 대추 호두 등 온갖 과실수가 자랐지만 유독 사과나무는 없었다. 하나 남은 묘목을 떨이로 싸게 준다는 화원 주인의 말에 솔깃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평생 해본 적 없는, 내가 심어준 나무에 과일이 열리는지 몸소 확인하고 싶었다.
열매까지는 모르겠고 예쁜 꽃 몇 송이쯤이야 설렁설렁 피리라는 기대와 설렘은 반나절을 가지 못했다. 마당 한 쪽에 구멍 깊게 파고 묘목만 푹 꽂으면 끝날 줄 알았던 나무심기부터 막혔다. 어설픈 내 삽질을 보다 못한 윗동네 자칭 농사 박사께서 끼어들어 겨우 마무리됐다. 농사 초보인 나를 불쌍히 여겼는지 고수만 아는 비법이라며 주변을 살피면서 낮은 목소리로 알려준다.
“야아는 약 안치고는 몬먹십니더. 꽃 필 때 한번 쓱 뿌리소. 열매가 익을 때면 다 없어질 끼라예.”
열매? 꽃향기만이라도 맡을 수 있다면 대성공이지.
따스한 바람이 나무와 풀과 꽃을 더듬고 찬란한 아침햇살에 세상이 기지개를 켜던 오월, 초록 잎을 매단 자줏빛 가지 위에 연분홍 물감 한 방울 살짝 섞인 봉오리가 배시시 얼굴을 내밀었다. 손톱보다 작은 꽃이 새콤달콤한 향기를 뿜고 있었다. 가까이 귀 기울이면 떼 지어 찾아온 꿀벌의 날갯짓이 사이렌 소리처럼 시끄럽다. 꽃에서 꽃으로 꽃만 한 덩치를 바쁘게 움직였다. 조신한 봄비 속 평화로운 그들만의 세계, 저런 풍경에 농약이라니!
장마가 다가오고 비바람이 세찼다. 흰 꽃은 꼬랑지만 달랑 남겨놓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쌀 크기의 꽃눈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농약 없이도 얘들은 잘 커갈 거라는 아둔한 기대가 앞선다. 숨겨둔 보물을 찾는 기분으로 새벽마다 사과나무 순례를 이어갔다. 그때껏 연초록 물때를 벗지 못한 작은 열매는 얼핏 별 문제가 없어 보였으나 박사님의 훈수대로 벌레라는 놈들이 때가 되면 여린 사과를 무자비하게 공격할 것이다.
그랬다. 밤톨보다 작고 도토리보다 커진 아기사과에 벌레들이 덮치기 시작했다. 돌돌 말린 잎사귀에 허연 섬유질이 엉겨 붙었다. 젓가락과 핀셋까지 동원하여 그들을 집어내는 내가 우스워 보였던지 내가 잡은 숫자를 훨씬 웃도는 벌레들이 다음 날이면 또 나타나 여물지도 않은 어린 사과를 갉아먹었다. 사과나무가 통째로 멍들어갔다. 벌레도 먹고 살아야 한다던 나의 어설픈 자비심이 그 열 배는 더 될 초조함과 복수심으로 변해갔다. 7월이 되기도 전에 성한 열매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세 번의 봄날이 지났다. 사과는 변함없이 벌레들의 차지였다. 해마다 꽃이 피고 열매는 달렸지만 벌레들은 그들이 자라날 잠깐의 틈도 허락하지 않고 깡그리 먹어치웠다. 박사님의 살가운 꾸지람이 반복되었고, 그럴수록 농약을 쓰지 않겠다는 나의 오기는 더더욱 굳어갔다. 농약도 비료도 없었을 시절, 인간은 어떻게 벌레를 피해 사과를 키웠을까.
유령인간이 찾아왔다. 상한 사과부터 들여다본다. 약 좀 치라는 소리, 그럴 생각이 없고 어떻게 하는 줄도 모른다고 얼버무렸다.
“그래도 얘가 나보다는 훨씬 나아. 항상 바라봐주는 ‘너’라도 있으니.”
“회사에서는 여전히 유령인간으로 사나?”
“....... 이름 좀 바꿔주라. 투명인간.”
유령인간보다 존재감은 있지 않느냐 덧붙인다. 맘고생이 어지간했나보다. 호칭을 바꿔줬더니 점심이 공짜였다. 혼자 가서 2인분 식사를 주문하면 식당에서 이상하게 생각하겠다며 오십 중반을 훌쩍 넘긴 두 애가 사과나무 아래서 낄낄거린다.
해가 바뀌었다. 꽃이 유난히 많이 피었다. ‘갉아 먹힐 걸’이라는 체념 속에서 혹시 그 중 ‘몇 개는 살아남을 거’라는 기대를 버린 적 없다. 늦장마가 시작된 7월 초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른 무더위와 오랜 가뭄을 핑계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사과나무에 열매가 달린 것이다. 무엇보다 벌레가 없었고 크기도 앵두만 했다. 가지치기를 못해줘서 잔가지 끝까지 다닥다닥 매달린 모양새가 애처로워 보이기는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두만큼 커졌다.
잠잠하던 벌레가 느지막이 쳐들어오면 나무는 다시 그들의 천국일 것, 단맛은 덜하지만 벌레 먹기 전에 미리 따서 주위 분들에게 자랑 겸 인심이나 듬뿍 써야겠다. 농약 한 방울, 비료 한 줌 없이 열매를 내준 사과나무가 대견했다. 설익은 아이들을 바라보는 호사가 분에 겨워 콧등이 시큰하다.
지나는 길에 들르시라고 농사 박사님께 연락을 드렸다. 탐스런 애기사과를 살펴보고도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참새는 절대로 아닌 분, 진한 사투리가 거침없이 쏟아진다.
“야, 고 넘덜 참말 잘 컸데이. 약 칬구만. 거 보소, 진즉 뿌리삐지.”
박사라고 다 아는 건 아니다. 문득 회장님 눈치 살피기 바쁠 임시직원이 떠올랐다. 핸드폰을 열고 문자판을 더듬어 몇 자 두드린 후 발신 단추를 꾹 누른다. 사과나무가 투명인간한테 할 얘기가 있대요 언제 올래? 밥값 또 낼 일이야. 지갑 챙기는 거 잊지 말고. 미리 축하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