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창한 숲속 굽이굽이 황톳길이 아름드리 거목을 이고 간다. 빽빽한 나뭇잎 새를 용케 헤쳐내린 햇살이 빗물처럼 쏟아지고 길섶 계곡 밑 바위틈으로 미끄럼 타는 물살이 우렁차다. 명산은 가뭄에도 물을 품는다더니 명불허전이 따로 없다. 승선교(昇仙橋)를 지나 사찰 앞 홍살문까지 완만한 오름길 내내 숲이 뿜어내는 임향(林香)이 발길 따라 풀썩거리는 흙냄새와 뒤엉킨다.
문화유산 해설사의 목소리가 들떴다. 무선마이크 속 갈라진 음성이 드문드문 끊긴다.
“저 아래 다리와 여기 법당 건물, 문화재로 지정된 보물은 사람이 그리고 만들었어요. 신선만이 빚을 수 있는 걸작 세 개는 따로 있답니다. 봄꽃, 가을단풍과 지금까지 우리가 밟아온 오솔길이요. 보장하건대 삼월 홍매화와 왕 벚꽃 그리고 시월 단풍은 이 세상 최고입니다!”
득도하지 못한 자괴감으로 자살하려던 스님을 신선(仙)이 나타나 구한 후 하늘로 올라갔다(昇)는 돌다리를 설명할 때 여기 널린 모든 것이 ‘세계 최고’라고 엄지를 추켜세우던 그녀의 너스레를 진즉 알아봤다. 봄도 가을도 아닌 하필 여름 한복판, 굳이 때 맞춰 먼 걸음 다시 할 필요까지야 있겠나. 내 이를 ‘어엿비너겨’ 무방한 ‘이 세상 최고’로 그냥 인정하고 말지.
유네스코는 태고종의 본산 선암사(仙巖寺)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천 년 넘도록 한국의 불교문화를 계승하고 지킨 종합승원’이라는 점을 그 근거로 명시했다. 국보급 수려한 보물 네 점을 보유하고 있다는 중후함과 달리 첫인상은 소박하고 수수하다. 대부분의 건축물이 크거나 높다기보다 작거나 낮다. 대처명찰(大處名刹) 앞에서 당연하게 밀려오는 장엄함과 그로 인해 엄습하는 위압감이 없다. 본존불을 모신 금당의 규모가 다른 사찰 대비 아담하며 눈이 불편할 만큼 울긋불긋 촌스러운 단청 깔도 이곳에서는 가라앉아 진중하다.
구역 별 경계를 가르는 담벼락은 근방에서 주워온 돌로 채운 듯 친숙하다. 꼭 필요한 곳 말고는 애라도 훌쩍 뛰어넘을 높이의 새끼줄로 금을 그었다. 봄이면 매화와 벚꽃으로 가을엔 색색의 단풍이 뒤덮는 낮은 기와 담장 사이 정겨운 골목길과, 구불구불 오솔길을 지나 산 중턱에 편안하게 들어선 본당까지 자연 속으로 부드럽게 녹아든 품이 아늑하다. 저 산이 이 절을 품었는지 이 절이 저 산을 업었는지 모른다. 귀중한 보물들이 머릿속에 덜컥 들어오지 않는 까닭도 보이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쉽지 않은 문화재 이상의 뭔가가 선암사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성 깊은 사찰 내력과 정갈한 분위기만이 이곳의 전부는 아니다. 선암사 일대 임야를 보유한 조계종과 50년 넘게 이 절을 실질 운영해온 태고종 간 소유권 분쟁이 대표적이다. 육십 년 넘게 두 종파는 자신들이 이곳의 주인이라며 법정 다툼을 벌였다. 국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목조관음불상의 진위 여부도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도난 사건이 빈번했던 1990년대 중반 몇 달 간 이 불상을 모조품으로 대체했다가 진품으로 다시 봉안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시작됐다는데, 불상은 말이 없고 진실을 둘러싼 양측 간 입씨름만 무성하다. 세상사 고통과 괴로움은 사람들의 헛된 욕망이 그 원인이라는 불가의 가르침이 무색하다. 양쪽 모두 법적 근거와 상식적 명분이 있겠지만 나 같은 소시민의 좁은 소가지는 속세를 떠나 수도하는 구도자의 탐욕부터 입에 올린다. 오지랖 멈추라는 신호였나, 현실적 고민이 아랫배를 압박한다.
화장실 형태와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뒷간’이라는 말은 어릴 적 촌구석에서나 쓰던 구식, 나는 거기서 일 보기를 주저한다. 발판 밑으로 떨어지면 똥오줌과 뒤섞여 한없이 떠내려간다던, 누군가 툭 던진 농담이 우스갯소린 줄 알면서도 거림직했다. 불현듯 스친 생각 하나가 걸음을 멈춰 세운다. 오래된 한옥, 단아한 반가의 정원처럼 운치 있는 이 산사를 갖고 싶다는 욕심이 꿈틀거리던 참이다. 아라비아 사막 모래 속에 묻혀있을 알라딘의 램프 요정 지니를 불러낸다면, 그래서 내가 통째로 이 절을 퍼갈 수 있다면 볼썽사나운 분쟁으로 인해 바람 잘 날 없던 이곳이 잠잠해지지 않을까. 발길을 돌린다. 세계 최고라는 화장실로.
남의 것을 들고 가겠다는 내 뻔뻔함 먼저 털어내야지. 배설이란 몸 안의 찌꺼기를 제거하는 일, 한 줄기만 빼내도 근심이 사라지고 몸이 가벼워진다. 욕심을 제거하는 행위도 이와 같다면 얼마나 좋으랴. 동시대의 현자였던 부처와 공자께서 뭇 대중들에게 설파하셨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 이 우주를 지탱하는 기둥이며, 창피함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라고. 부끄러운 내 속마음도 함께 쓸려가려나. 구덩이 아래 깊은 바닥으로 시원하게 쏟아버렸다.
소문 듣고 쫓아와 내 수중에 있지도 않은 정원을 탐낼 밤손님 부담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야무진 꿈도 꿈으로 멈춰 다행이라 여겼다. 그러나 소유한다는 것도 그리고 갖고 싶다는 욕망조차도 영원할 수 없으련만 차마 내버리지 못한 욕심 끝 한 줄기 아쉬움이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새털처럼 폴락거린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아름다운 정원을 항상 옆에 두고 싶다는 희망사항은 불경죄에 다름 아니다. 초대한 적 없는 남녘 땅 먼 곳 선암사가 가슴 한 구석에 덜컥 눌러앉았고 난 돌려보낼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다. 사람 되기를 포기해야 할지 때 아닌 고민이 깊어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