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한 낮달이 초저녁부터 겹쳐 보이기 시작한다. 안개 자욱한 어스름 강가에 선 것처럼 흐리흐리하다. 뻑뻑한 안구를 바늘로 찌르듯 모래알로 비비대듯 눈자위가 쑤신다. 가려움을 참지 못한 손등이 따가운 눈두덩을 자꾸 오르내린다. 창밖의 아크릴 간판 글씨가 덩어리로 뭉쳐 꿈틀거린다. 거울 속 저편의 핏발 선 두 눈이 일그러진 내 얼굴을 멍청하게 바라본다. 육중한 벽 하나가 반갑잖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반나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사십 대로 접어들면서 가끔 그랬었다. 그래도 금방 정상으로 돌아왔다. 긴 세월 혹사당한 내 눈이 어련할까 대충 넘기다가 의사 친구의 경고가 무서워 안과를 찾은 때가 10여 년 전, 수술 한 방으로 눈이 밝아졌고 일상이 편안했었다. 아픈 것도 문제지만 오래 전 갑갑했던 상황보다 더 나빠질까봐 초조하다. 하필이면 금요일 저녁, 응급실 말고는 정식 진료 받기도 쉽지 않을 텐데.
몸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 평소 귓전으로 흘리는 잠언의 근거가 궁금했다. 그 와중에 손 전화를 뒤진다. 부피로는 신체의 오천 분의 일에 불과한 눈이, 감정과 기분을 드러내는 창구이자 외부 정보탐색 및 수집 기능 등 역할이 대단하다. 그러면 사람 눈의 가치를 천 냥 중 구백 냥으로 산정한 옛 어른들의 평가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구십 냥쯤 더 보탠다면 모를까.
나아지겠지? 점점 심해졌다. 눈자위도 부어올랐다. 눈을 감는 것이 편했다. 아니, 저절로 감겼다. 한쪽 눈은 있으나마나, 앉아있어도 서 있어도 마냥 불편하다. 눈이 아프다는 사실은 보기 힘들다는 단순함으로 끝나지 않았다. 생각하고 움직이는 행동 포함 일상생활의 상당 부분을 한꺼번에 정지시키는 황당함이었다. 무기력한 주말 이틀이 80년 오월 중순의 ‘서울의 봄’ 시작점이던 금요일 저녁을 빼닮았다.
종로통 곳곳에 시뻘건 불길이 널름댄다. 기세등등하던 대낮의 시위 행렬은 해질녘부터 맥없이 수그러지고 전투경찰의 방패와 곤봉 앞에 피라미처럼 흩어지기 바쁘다. 하필 그런 날 그런 곳이었을까, 세 번 만난 여학생을 서둘러 보내야 했다. 전화번호도 모른 채 얼결에 헤어지고 이틀, 월요일 조간은 탱크를 앞세워 대학가로 진입한 계엄군 사진을 1면 톱기사로 내보낸다. 그건 벽이었다. 그녀와의 연락 방법을 완전히 막아버린...
휴교 조치가 해제된 구월 초까지 백 일 넘는 기간이 시름없이 흘러갔다. 권력이 사람의 입과 눈과 귀를 가렸던 때다. 떠벌리지 않고 듣지 않은 척만 하면 그만일 입이나 귀와 달리 시각적 경험에 별나게 민감한 나에게 그리움이라는 감정은 아무리 안 그런 척한다고 해도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그땐 훤한 눈으로도 첫사랑을 볼 수 없었고 지금의 망가진 눈은 코앞의 형태마저 구별하지 못한다.
눈이야 어쨌든 세상은 굴러갔다. 나 없이도 별 탈 없는 상황이 한편으로 당혹스러웠다. 가뜩이나 내세울 것 많지 않은 내 존재감마저 덩달아 없어질까 걱정이었다. 눈 말고는 다 성한데 밝았던 세상을 추억으로만 되새기며 살기엔 한참 젊은 나이, 인정하기 거북한 현실 앞에서 풀이 죽는다. 세월이 가면 옛날도 흐려지고 그러면서 나는 세상을 세상은 나를 차츰차츰 서로 지워가는 걸까. 주말 이틀이 느려 터졌다. 월요일 아침 일찌감치 집을 나선다.
이게 도대체 왜 그래요, 의사가 묻고 나는 속으로 대답한다. 그걸 알면 내가 의사 하지. 눈물 약을 자주 넣고 눈동자를 움직여라. 안구 건조나 미세먼지가 원인일 수 있다. 컴퓨터와 핸드폰 사용을 멈추어라. 절대 안정할 것. 먼 곳을 자주 보고 며칠 지나도 좋아지지 않으면 대학병원으로 옮겨 정밀진단을 받아야겠다. 그로부터 사흘, 안약도 항생제도 철저하게 나를 거부한다. 눈 뜨기조차 쉽지 않다.
오래전 작고하신 김 추기경의 친필 휘호가 대학병원 대기실 벽에 걸렸다. ‘눈은 마음의 등불’, 아파서 그랬겠지만 액자 속의 붓글씨 일곱 자가 물색없이 반갑다. ‘창(窓)’을 대신한 ‘등불’을 바라보며 이곳을 추천해준 의사 선생님이 문득 고맙다. 그것도 잠깐, 두 시간 넘는 사전 검진과 그에 따른 처방은 혹독했다. 서너 가지 약을 일어나서 취침 때까지 시간 맞춰 먹고 바르고 떨어뜨리고... 애꿎은 눈꺼풀만 온종일 괴롭게 생겼다.
안약과의 불편한 동행은 40일 넘게 이어졌다. 40여 년 전의 휴교 시절만큼이나 암담했다. 눈이 아파 움직이기 불편하자 의지까지 약해지면서 생각도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절망과 희망, 어둠과 등불 등 평소라면 심드렁했을 관념적이며 조금은 철학적인 용어들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랬지. 내 눈과 검사 차트를 번갈아 살피던 의사 선생님께서 내 속내까지 읽었다는 듯 입을 연다. 됐어요, 이젠 동네 병원으로 가세요.
지난 연말 동창 친구가 안부를 물어왔었다. 우리 삼재 끝물이야, 조심하자고. 쉬이 가기 섭섭할 날삼재의 고약한 심술을 경계하라기보다는 건강하게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이었다. 따뜻한 친구의 몇 마디가 마술이라도 부린 것일까, 설 지나 대보름날 밤 눈앞의 흐린 벽이 걷히면서 둥근달이 훤히 떴다. 언젠가 세상을 떠날 사람들, 옆에 있어도 때로는 볼 수 없는 소중한 존재들, 이제는 눈이 아프도록 바라보리라. 맑아진 눈 속에 차곡차곡 담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