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밭에 주홍 꽃이

by 문예반장

흰 눈밭에 주홍 꽃이


아침 식사로는 샌드위치, 견과류, 계란, 야채와 과일 등 네댓 가지를 준비한다. 계절 따라 기본 재료가 바뀌어도 사시사철 끊임없이 올라오는 식단이 시큼해서 별로인 요구르트다. 섞어 먹는 고명이 오히려 입맛을 돋운다. 때론 그 숫자가 열 가지 이상인데 늦가을부터는 그 위에 연시가 추가되면서 새벽녘 네댓 평 빽빽한 부엌이 훨씬 부산해진다.

강산을 바꿔놓고 무소불위 권력도 자빠뜨린다는 십 년 세월, 서리 내리기 전 11월 초부터 이듬해 정월 초까지 늘 그랬다. 천년만년 살고 싶어서가 아니다. 광적으로 유기농을 선호하는 깔끔이도 아니다, ‘십여 분의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여 얻어지는 혀와 뇌의 즐거움이 시중의 정제 가공된 밀 키트나 레토르트 방식으로는 대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시장이나 마트에서 출시 날짜에 맞추기 위해 사용하는 급속 숙성기계를 거치지 않은 옛날식 연시를 만들었다. 느리게 익고 상하기 쉬우나 연애보다 짜릿하고 첫사랑만큼 풋풋한.


딱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다. 벚나무 단풍길 따라 멈췄다 이동하며 가다가다 도착한 곳이

지리산 자락 남쪽 끝이었다. 차창 밖으로 사람들 몰릴 만한 곳 어디나 주먹보다 커다란 감이 푸짐하게 쌓였다. 내려오는 길에 잡힌 농가의 자잘한 감과 집 안팎에 걸린 곶감은 드물었다. 하기야 커다란 감으로 곶감을 만들 이유가 없을 터, 지형이나 위도 기후 등이 그 현상의 원인 아니겠느냐고 어림짐작은 했다. 굵직하고 잘 생긴 대봉이 가격까지 좋은 판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세 상자를 싣고서 돈 더 내라고 떼쓸까 겁나 부리나케 출발했다. 그날 이후 해마다 가을이면 월동준비 겸 바람 쐬러 그곳으로 달려간다.

멀다. 대한민국에서 다섯 시간 넘게 달릴 곳이 있기나 한가. 왜 갔는지 기억조차 희미한 오래 전 출장길, 미국 중남부의 아틀란타에서 서부 엘에이까지 비행기로 그쯤 걸렸다. 차로는 서른 시간 이상이라 하니 서울에서 하동까지 250여 킬로미터쯤이야 말 그대로 새 발의 피에 불과한데도 지친다. 세 시간 남짓 쉼 없이 달려 섬진강변 아담한 장터 앞에 멈춘다. 뒷골부터 장딴지까지 온 몸이 노곤하다. 차에서 내려 두 팔을 하늘 위로 쭉 펴는 순간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황홀하다, 올망졸망 늘어선 노점상 곳곳 감빛 더미가 뿜어내는 주황의 물결... 그 뒤로 붉게 물든 할머니의 얼굴이 가물거린다.

전날 오후, 몇 번째 발신 만에 통화가 된 할멈은 일 년만의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기도 전 들입다 질문부터 퍼부었다.

“아, 우째 지냈능교? 은제 올라꼬? 오널?”

“내일쯤이요.”

“단디 하시요. 쟈들, 참말로 실하다.”

해마다 찾아오는 내 속을 빤히 꿰차고 있는 할멈과의 기 싸움에서 나는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다. 흥정이 시작된다.

힘들게 농사지어 목돈 만져볼 기회를 놓칠 수 없는 농부와 대량(?) 구매를 앞세워 가격을 깎아보려는 과똑똑이 간의 줄다리기는 따지고 자실 것 없이 무적 할머니의 완승이었다. 절대 지불하지 않겠노라고 모질게 맘먹었던 금액보다 20%쯤 높은 숫자로 타협은 이뤄지고 예견된 보상이 축제처럼 펼쳐진다. 밤, 유자, 석류, 모과와 나물류를 서비스라며 주섬주섬 내놓는다. 때깔 좋은 연시로 숙성되어 먹음직스러운 대봉 열 댓 개까지 선선히 내놓는 할머니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깔려있다. 또 당했구나.

스무 날 정도 구석방에 띄엄띄엄 늘어놓는다. 검은 반점 수가 늘어나면서 색깔도 주황에서 주홍으로 진하게 변한다. 톡 누르면 젖살 오른 아기 피부처럼 말랑말랑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탱탱하던 껍질은 자글자글 쪼그라들고 딱딱하던 속살이 차곡차곡 단맛을 재워간다. 스러지고 피어가는 두 모습이 한 몸 안에 공존한다는 사실을 처음 안 것도 아니련만 또 새롭다. 귀찮은 새벽일을 기꺼이 감수하자. 북향 시원한 공간과 차곡차곡 쌓인 시간이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순리대로 우려낸 인고(忍苦)의 정수(精隨)를 겨우내 감사히 받아야지.


충분히 익은 연시를 골방에서 꺼내와 양손을 깨끗하게 씻고 수저를 잡는다. 반투명 얇은 막과 알맹이를 분리하고 떼어내는 작업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껍질과 과육이 제멋대로 섞이고 묻어나서 속만 다시 골라내다 보면 손바닥과 식탁은 순식간에 감으로 뒤범벅된다. 대충대충 먹지 뭘 이리 난리법석을 피우는지 가끔 나도 의문이다. 뽀얀 요구르트는 아이스크림용 유리잔에 미리 담아뒀으니 이제는 천상의 맛을 즐길 일만 남았다. 뿌듯하다. 발라낸 감을 반으로 나눠 유리잔으로 옮긴다. 흰 눈밭에 주홍 꽃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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