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호수에서 청계사로 접어드는 길목, 낮은 언덕을 배경삼아 정남향으로 넉넉히 자리한 음식점의 커다란 유리창이 기운 햇살 받아 반짝인다. 건물 한 귀퉁이를 ‘ㄱ’자 형태로 길게 늘여 출입문을 냈다. 얼핏 보아도 풍수지리 개념을 착실하게 도입한 건물이다. 안벽을 따라 맨바닥에 늘어놓은 놋쇠 대야, 둥그런 바가지와 넓은 소쿠리에 참외만한 과일이 올망졸망 담겼다. 입구부터 좁은 통로 끝까지 그들이 뿜어낸 향기가 넘쳐난다. 울퉁불퉁한 겉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윽함이 고혹적이고 황홀하다. 상큼함이 과일의 대표적 속성이라고들 하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새콤하다는 말만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향을 적절하게 표현할 낱말이 있기나 할까.
얘들을 출입구에 줄줄이 늘어놓은 이유도 궁금해졌다. 한방에서 약재로 쓴다는 사실이야 잘 알지만 승용차 뒷자리에 방향제 삼아 두세 개 놔두거나 설탕에 재워 차로 마실 용도 외에 또 뭐가 있을까. 식사하러 찾아온 손님들 상대로 팔아보려고? 얼마나? 굳이 문제 삼을 일 아닌데 삐딱해지는 내 심보는 또 뭐람. 모과 향에 취했기 때문인지, 그렇다면 뭔 짓인들 못해. 홀 안쪽을 향해 시비를 건다. 한 개 가져갑니다!
안주인이 틀림없다. 영업 마감 시간, 주말이면 그나마 남아나는 것 없다며 괜한 너스레를 떨다가 눈을 깜박거리더니 검지를 위로 치켜세운다. 하나만? 판매용은 아닌가보다. 튼실해 보이는 놈 하나를 골랐다. 하나 더?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도리질 친다.
“왜요? 공짜라서? 꼭 필요한 분들 많은데.”
“예뻐요. 향기도 기막히고.”
“예쁘다니, 설마! 우리 아저씨는 저 닮은 애들만 잔뜩 늘어놨다고 맨날 면박인데요.”
이때구나 싶어 한 개를 더 집어 들고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딴 손님에게는 비밀이라며 손사래 치는 식당 주인의 생김새와 말투가 호주머니 속 모과만큼이나 수더분하다.
한자어 목과(木瓜)에서 유래한 모과는 어원대로 따지자면 나무에서 크는 참외일 것이다. 매끈하지 못한 겉모양, 떫고 신 맛에다 껍데기를 뚫고 치솟는 끈끈액 때문에 사람들은 이 과일을 과일이되 과일답지 않은 과일로 친다. 오죽했으면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속담까지 생겼을까.
예쁘다거나 흉하다고 찍어 말하는 것이 차별의 본래 의미는 아닐 것이나 요즘 세상에서 못났다는 말을 입에 올리면 비난의 화살을 피해가지 못한다. 식물의 세계까지 만연한 외모지상주의인 탓이라 가정하면 모과는 적이 억울할 지도 모른다. 꽤 볼만한 꽃인데도 개나리, 매화나 벚꽃 등에 가려 존재감이 떨어지며 심지어 모과나무 꽃이 있는지도 모르거나 혹은 있으나 마나 관심조차 없는 일반인이 부지기수다. 예쁜 꽃커녕 못난 열매로 각인된 현실이 안타깝지만 본래 가치가 어디 갈 일 없다.
‘동남풍에 떨어진 모과’도 겉모습이 변변치 않은 여자를 빗대 폄훼하는 말이다. 그런데 볼품없는 형태와 혀를 거스르는 맛 등 무엇 하나 번듯이 내세울 것 없어 뵈는 과일이지만 기를 쓰고 겉치장에 매달리는 속물들 허영보다는 소박해서 좋다. 내 짧은 소견으로 볼 때 모과 최고의 미덕은 단연코 향이다. 같은 장미과 식물인 장미, 찔레와 모과를 비교해보면, 우선 장미는 황홀하다. 많은 향수가 추구하는 향의 전형이며 어찔하게 세다. 찔레 향은 장미보다 연하나 넓게 깊게 퍼져나간다. 그 둘보다 향기가 연한 모과는 멀리 그리고 낮게 깔린다. 한여름이 지나고 열매가 달리는 가을부터 이 과일의 진수가 유감없이 드러난다. 있는 듯 없는 듯 두루두루 퍼지는 향기는 그가 가진 여타의 단점을 충분히 메우고도 남는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 전하는 약재로서의 효능이 오히려 덤일 것 같다.
도자기 접시 위에 모과 두 개를 가지런히 올렸다. 색과 크기, 모양새까지 각각인 얼룩이 아기 엉덩이에 박힌 몽고반점을 닮았다. 한쪽엔 다양한 선 모양의, 다른 쪽에는 분화구처럼 넓게 패인 선홍 생채기가 제멋대로 아무 곳에나 덜렁 눌러앉았다. ‘음표가 음악을 구성하듯, 음높이가 화음을 자아내듯’ 자연스러운 형태와 부드러운 색감의 낙서를 제 몸 위에 생동감 넘치게 그려낸다. 칸딘스키 선생의 따듯한 추상화 <구성 8>의 어느 한 부분이 멀리 바다 건너 미국 땅에서 우리 집 식탁 위 모과 껍질까지 ‘순간 이동’해 왔다며 혼자 히죽거린다.
두 주가 지났다. 손톱 만하던 주홍 반점이 땅따먹기 하듯 야금야금 제 영토를 넓혀간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전제하에서 살아갈 시간의 길이는 지나간 세월의 양만큼 반비례한다. 겨자 빛 껍질 위 진자주 반점이 짙어갈수록 그 면적이 넓어질수록, 그리하여 껍데기 전체가 새까맣게 변해가면서 내 후각을 화들짝 일깨웠던 새콤한 향도 시나브로 사그라질 것이다. 지금이라는 시간과 이곳이라는 공간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삶이 자신의 존재 이유라고 일러주는 듯하다.
바깥으로 들어나는 화려함보다는 안으로 넘쳐나는 그윽함으로, 과시욕이나 경박함보다는 겸손함과 조신함으로, 순박한 모습의 모과처럼 오래도록 은은하게 향기를 전하는 사람, 그런 영혼의 소유자를 그린다. 새봄이 오면 뒤뜰 빈자리에 모과나무나 한 쌍 들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