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친김에

by 문예반장

메마른 계절이다. 지나간 겨울 우리 동네에 눈(雪)이 내린 날은 겨우 이틀뿐이었다. 우중충한 겨울비마저 못내 아쉬운 가뭄이 계속됐다. 평균적으로도 예년 겨울보다 따듯하고 봄보다는 차가운 날씨가 겨우내 이어졌다. 가끔 대단히 덥거나 추운 이상 현상을 보였다. 이 나라의 기후 특징인 삼한사온과 뚜렷한 사계절 언급은 조만간 교과서에서 사라질 듯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멈칫거리던 새봄이 뜰 안을 빽빽하게 메운 민들레로 모습을 드러냈다.

4월, 게으른 봄이 걸음을 주춤대던 새벽녘, 부엌 창을 여는 순간 눈에 들어온 꽃 무리가 창틀을 메웠다. 뒤뜰을 하얗게 덮어버린 그게 뭔지 처음엔 아련했다. 기다란 꽃대 위에 한 송이씩 매달려 따듯한 봄바람 따라 흔들거렸다. 겨울 같지 않은 날씨 때문인지 까맣게 잊고 지냈던 하얀 민들레가 뜰안채 새벽을 일깨우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도 겨울은 온다더니, 꽃도 예외는 아니었나 보다.


그해 봄, 나는 현리를 거쳐 명지산 자락 서쪽 도로를 달려가고 있었다. 운악리까지 가는 길은 스무 살 무렵 흙먼지 풀풀 나던 적막한 풍경과 큰 차이가 없었다. 신기하고 반가웠다. 게다가 차가 달리는 것이지 그때처럼 발 아프게 걸을 필요도 없어 편했다. 도착지나 여행 목적이 분명치 않은 상태로 무작정 걷다 달리다 쉬다가 아무 버스나 집어 탔던 옛날과 달리 이유와 장소가 분명한 나들이였다.

무지 멀었다. 직선으로 오십 킬로 내외일 거리를 산과 들과 강에 막혀 빙빙 돌았다. 자칭 민들레 도사라던 오십 후반의 사내, 내 눈치를 살피며 가격 흥정을 하던 품으로 판단하면 도사는커녕 일반 장사치에 불과했다. 하기야 나도 흰 민들레를 찾아 나선 사람이니 돈으로 시비 걸 입장은 아니었지만 예상치를 훨씬 웃도는 가격의 귀한 민들레가 트렁크에서 퍼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차를 몰았다.

뜰 안의 빈자리를 찾아 민들레를 심었다. 한쪽에 다섯 평 공간을 할애하여 아예 단지를 만들었다. 이 꽃은 기껏해야 이틀쯤 꽃을 피운 다음에 솜털 깃 안에 꽃씨를 만든다. 반드시 같은 종류의 다른 개체와만 수정작업이 가능하다. 노란 민들레보다 번식이 느리고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숫자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여름 지나 가을까지 살아남은 하얀 민들레는 다섯 주뿐이었다. 내 허술한 재배 솜씨도 개체 수 대량 감소의 또 다른 원인이었을 것이다.

다음 해 봄, 민들레가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냈다. 많지 않은 숫자라 아쉬웠고 질기게 남은 생명이라 애처로웠으며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미안했다. 새벽에 핀 꽃이 점심 먹기도 전에 꽃씨로 변해 바람 타고 흩날렸다. 어디로 가든 좋아, 그저 자리나 잘 잡아 씨나 많이 퍼뜨리라고 날아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인사한다. 하루 한 번씩 마당 안팎을 돌면서 죄 없는 노란 민들레를 뿌리째 뽑아버렸다. 눈에 보이는 대로, 인정사정이라고는 코빼기만큼도 없이.

삼 년 지나 다시 봄, 그간 다섯 송이 민들레를 위해 거름을 뿌려주고 뜰 안의 경쟁자라 할 만한 노란 민들레를 뽑아주는 정도가 하얀 민들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식물에는 영 문외한인 주인을 만나 힘들었을지 몰라도 지난 몇 해 보여준 그들의 생명력은 놀라웠다. 듬성듬성 보이는 이 꽃은 그러나 천천히 숫자를 늘려가고 있었다. 최소한 그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뿌듯했다. 며칠 후 황당한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동네 이장이 찾아왔다. 농가 지원, 영농세, 조합 등 잘 모르는 말들을 늘어놓더니 토질이 좋지 않으면 작물이 자라기 힘들다며 복토(複土)를 권했다. 남는 흙이 있으니 운전사 담뱃값이나 챙겨주라고 부탁한다. 공짜 흙이라는데 이장 권유를 따르기로 했다. 말 떨어지기 무섭게 그날 오후 트럭 세 대가 텃밭으로 들이닥쳤다. 삼, 사십 개는 족히 될 하얀 민들레가 흙 속에 파묻혔다는 사실을 포클레인 기사가 돌아간 후에야 깨달았다. 낭패였다.

두 해 넘도록 하얀 민들레는 우리 밭에서 사라졌고 내 생각에 눈치 없기로는 흥부보다 더한 노란 민들레가 하나씩 또 피어나기 시작했다. 흙 속에 묻힌 하얀 민들레가 돌아오기란 암만 생각해도 불가능할 것. 그러나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해가 바뀌어 새봄이 오자마자 두꺼운 흙더미를 뚫고 하얀 민들레가 꽃을 피웠다. 가냘프고 여려 보이는 이 종자의 생존 방법과 살아남은 그들 생명력의 근원을 아둔한 내 머리로는 헤아리지 못한다.


언제부터였을까, 우리 집 마당의 노란 민들레 수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집주인까지 텃세를 부렸던 탓인지 아니면 하얀 민들레가 힘이 세졌는지, 가만히 둬도 봄이 되면 앞마당 시멘트 틈새까지 남김없이 하얀 민들레가 차지했다. 뒤뜰로 나선다. 노랑이 불쌍해 보인다고 하양을 버릴 수 없는 일, 봄 채소를 심을 날이 머지않다. 어쩐다지, 텃밭을 점령해버린 하양 무리를 깡그리 뽑아버릴 수도 없고. 간단한 방법이 있기는 하다. 그 알량한 쌈 모종 몇 포기 심는 것쯤 올 한 해 접어버리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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