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에서

by 문예반장


눈(雪)이 메말랐다. 달갑잖은 겨울비조차 아쉬웠고 계절이 바뀌어도 봄 가뭄은 계속됐다. 지난 몇 년 마음껏 게을렀더니 텃밭엔 잡초더미와 잔가지가 켜켜이 쌓였다. 잘못 없는 갈색 우중충함을 원인 제공자인 내가 외면한다. 그나마 이곳 주인은 그들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날이 따듯해졌다. 칠팔 년 넘게 꾸준히 개체 수를 불린 민들레가 뒤뜰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덤불 위를 하얗게 덮어버렸다.

말 많은 동네다. 집주변을 깨끗이 하라고, 이웃과 살갑게 지내라고, 괜한 땅을 놀린다고 툭하면 수군댄다. 호미질을 시작했다. 눈칫밥을 먹기 싫어서만은 아니었다. 땅 아래로 뻗어 우리 집까지 찾아온 두릅의 알싸한 향, 농약과 제초제 없이 번듯이 자란 토마토의 새콤함이 그립다. 한동안 뜸했던 지렁이, 개구리와 반딧불이도 불러오고 싶었다. 민들레가 눌러앉은 장소를 피해 네댓 평 공간을 골라 쌈 채소 몇 종류를 꾹꾹 눌러 심었다.


그날부터였다. 며칠간 장마 끝 뙤약볕처럼 뜨거운 날이 이어졌다. 말라비틀어진 흙에서 먼지가 폴폴 날린다. 물만 충분히 줘도 쑥쑥 자라는 채소가 축 늘어져 비실거린다. 당분간 비 소식은 없을 거라는 기상청 예보가 야속하다. 내 고민이 농사짓는 사람들보다 더할 리 없으련만 초짜에다 껍데기만 농부인 나로서는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옆집 아저씨한테 도움을 청했다. 물부터 흠뻑 주라고 한다. 분사기와 호스를 준비했다.

당장 토마토가 문제였다. 한 뼘 크기 모종이 뭘 어쩌자고 그 며칠 새 손톱 크기 열매를 덜컥 내어놨다. 밤엔 초가을 날씨, 대낮은 한여름 기온이 반복되었다.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줄기가 부실하게 매달린 아기 토마토를 이기지 못한다. 플라스틱 막대를 바닥에 꽂고 토마토를 묶어주던 내내 서툴고 거친 내 손이 애 많이 먹었다.

쌈 채소는 부쩍부쩍 커갔다. 쌩쌩했다. 하루 한 번 물을 주기 시작하면서 생긴 변화였다. 며칠 만에 손바닥만큼 자란 채소를 바라보며 즐겁던 기억은 막상 이파리를 갉아먹기 시작한 벌레와 마주치는 순간 짜증으로 바뀌었다. 멀쩡해 보이던 다른 상추도 뜯어내고 보면 성한 부위가 드물었다. 쌈을 따서 바구니에 담는 동안 시퍼런 애벌레를 한 다스 이상 털어냈다. 쓰디쓴 적겨자가 공격을 많이 받아 뻥 뚫린 구멍이 제일 많다. 맛이 괜찮다는 얘기겠지.

몇 년 전 그때도 텃밭 채소는 벌레의 주식이었다. 종종 들르던 이장 아저씨가 떠오른다. 저분들이 남겨둔 부스러기나 먹어야지요. 그게 싫으면 약을 쳐야 하는데 그건 싫다 하시니. 맛은 좋을 겁니다. 벌레가 기미상궁 역할을 해줘서 안전하고. 그들이 좋아한다면 사람한테도 좋을 테니까. 즐기며 키워요. 그냥 알아서 크라고 하면 벌레가 요렇게 기승을 부리잖습니까. 사나흘에 한 번쯤은 잡아주시고요.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린다. 희석한 농약을 음료수인 줄 알고 마셔 위에 구멍이 뚫렸다는, 농약을 먹여 사람을 죽였다는 등 섬찟한 말들. 어찌 머물게 된 시골 동네 뙈기밭에 알량한 모종 몇 포기 기르면서까지 약은 치고 싶지 않다. 풀 메주기 고단한 뒷집 주인이 자기 밭에 제초제를 뿌렸던 예닐곱 해 전, 이틀 만에 엉뚱하게 죄 없는 우리 집 뜰 안의 반딧불이가 자취를 감추었다. 해가 바뀌어도 돌아올 기미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분사기로 물을 뿌렸다. 개구리 한 마리가 꽃상추 속에서 놀라 튀어나온다. 덩치가 보통은 넘는다. 도망갈 생각조차 없는지 나를 향해 커다란 눈을 껌뻑거린다. 한 발로 땅을 굴러도 꿈적하지 않는다.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뎌 다가가도 내가 움직인 만큼 뒤로 물러설 뿐이다. 이곳을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시위하는 듯하다. 꿈틀거리는 지렁이와 채소 위 퍼런 벌레가 널려있다.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좋다. 개구리는 돌아왔다.


곰곰이 돌아본다. 등기부상 권리자인 내가 이 땅의 진정한 소유자인가. 유실수나 잡초, 채소 모종과 봄날을 접수한 민들레? 개구리가? 이도 저도 완벽한 주인은 아니다. 서로서로 영향을 끼치며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 그 결과로 남은 부산물 중 일부만 내 소유다. 문제는 내 몫을 결정하는 주체가 나는 아닌 듯하다는 점이다. 밭에서는 벌레들, 밖으로 나가면 나와 주변 환경과의 관계, 그로부터 형성되는 세상의 순리와 조화, 그런 것 아닐까 싶다.

민들레는 제철이 올 때마다 자기 영토를 넓히며 뒤뜰을 지배하는 식물의 왕으로 군림할 것이다. 개구리 역시 개체 수를 불려가며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고수하리라고 믿는다. 뱀과 개구리 간의 전쟁은 그들 간의 방식대로 처리할 일이다. 지금처럼 농약과 제초제를 옆집이 사용하지 않는다면 애벌레도 살아남을 것이고 이곳에서 사라졌던 반딧불이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간 해왔던 짝퉁 농부의 게으른 농사법을 바꿀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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