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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십일월 Dec 11. 2023

모르는 남자를 집에 끌어들이는 넌 누구냐?

소개팅 어플남 #5

#5.



나는 45도 각도의 얼굴이 나온, 셀피가 아닌 남이 찍어준, 수줍은 듯 웃고 있는 얼굴이 나온 사진을 보냈다.


내 사진을 어디다 갖다 쓰면 어떡하지? 도용당하면 어쩌지?라는 걱정도 들었지만 그러기엔 저 남자의 프로필 사진이 너무 본인이었고, 그냥 얘도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 아닐까, 그냥 나처럼 외로운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수남 경연이도 겉모습은 멀쩡했던 것처럼.. 비록 마음은 멀쩡하지 않았을지라도… 따흑..


나의 뇌는 이런 식으로 이 상황을 합리화시켰다. 


이내 끼워 맞추니 또 다른 걱정이 몰려왔다.


내가 못생겼다고 갑자기 차단 박는 거 아닐까?라는 아주 신박하고 새로운 걱정말이다.


띠링-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23.9.1.22:15 효원: 에이~ 뭐야. 귀엽잖아요. ]



이 답장이 오기까지는 약 10초 안팎…


나는 그동안 별의별 고민을 다했고, 현타가 왔다. 근데 뭐 소개팅이나 어플이나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순간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다 똑같은 일이지,라고 또 상황을 합리화시켰다.



[23.9.1.22:15 이름없음: 다행일세;;]

[23.9.1.22:16 효원: 그래서 어디서 만날까요? 우리 집으로 올래요?  ]

[23.9.1.22:16 효원: [사진] ]



그는 총 다섯 개의 사진을 보냈다. 투룸의 신축 오피스텔.


인테리어에 신경 쓴 티가 팍팍 났다. 두 개의 방 중에 하나는 다이닝 룸이었다.


‘방 하나를 식탁에 뺀다고?’


아, 프로필 사진에서 주방에서 찍은 사진이 있었지. 아마 이 녀석은 누군가 오면 요리해 주는 걸 좋아하나 보군. 요리사인가?


다른 방 하나는 베이지 색 카펫 위에 네이비 색의 침구가 잘 정돈된 침실이었다. 침대 옆에는 큰 키의 무드 조명 하나와 테라스가 잘 보이는 큼지막한 창문 앞에는 큰 몬스테라와 액자들이 놓여있었다.


거실에는 요즘 신혼부부들이 제일 좋아한다는 까사미아의 우터스 리클라이너 소파와 큰 티비가 있었고, 창문 쪽에는 역시나 액자들이 있었다.


‘오늘의 집에서 제일 잘 팔리는 액자모음을 종류별로 하나씩 다 산 거 아냐?’


주방에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고 드롱기 전기주전자가 있었다.


효원의 집은 여백의 미가 있다기보다는 처음으로 집다운 집에 사는, 경제력을 갖춘 30대 자취생의 욕망을 마구잡이로 실현해 보이는 듯 한 집이었다. 뭐 못 꾸민 거보다 나으니까 오히려 좋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의 니즈를 충족시켜 주자. 나는 칭찬을 갈겼다.



[23.9.1.22:19 이름없음: 와우, 집이 아주 인상적이네요. 신경 많이 쓰셨네요.]

[23.9.1.22:19 효원: 네 ㅎㅎ 신경 좀 썼어요. 올래요?]

[23.9.1.22:19 이름없음: 효원 씨 집만큼 좋지는 않지만 우리 집도 꽤 좋은데, 우리 집으로 올래요?]

[23.9.1.22:20 효원: 그래요? 어디 사는데요?]

[23.9.1.22:20 이름없음: 저 좌평동 사는데 ]

[23.9.1.22:21 효원: 지금 차로 가면 12분 정도 걸리네. 알겠어요]


나는 손을 올려 입을 틀어막고 놀라고 있었다.


‘역시 사진부터 보낸 게 예사롭지 않았는데. 이렇게 훅훅 진행된다고? 잠깐!’


나는 문득 무서워졌다. 원나잇스탠드가 두려운 건 아니었지만 그냥 오늘은 모르는 사람과 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문득 이 녀석 내가 상종해도 되는 사람이 맞을까 두려워졌다. 외로운 마음에 만나고는 싶었지만 그렇다고 준비된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23.9.1.22:24 이름없음: 잠깐만요]

[23.9.1.22:25 효원: ? ]

[23.9.1.22:25 이름없음: 근데 우리 만나면 무조건 자야 하는 건가요? ]

[23.9.1.22:26 효원: 음, 저 오늘 자고 싶은데.]



와우! 이 이 녀석 솔직하다! 조금 창놈 같지만 차라리 솔직한 게 좋았다.



[23.9.1.22:26 이름없음: 그렇다면 저는 오늘 패스입니다.]

[23.9.1.22:27 효원: 왜요? ]

[23.9.1.22:28 이름없음: 전 자고 싶지 않거든요. 다른 사람을 알아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23.9.1.22:28 효원: 알겠어요. 원하신다면 ]

[23.9.1.22:29 이름없음: 그냥 안 자고 술만 마시면 안 돼요?]

[23.9.1.22:30 효원: 전 꼭 오늘 섹스하고 싶은데…]

[23.9.1.22:30 이름없음: 서로 니즈가 안 맞으니 포기하겠습니다.]

[23.9.1.22:30 효원: 아쉽네요.]



내가 더 아쉬웠다. 이렇게 집에 혈기왕성한 채로 집에 들어가면 참 외롭겠지. 하지만 별수 없었다.



[23.9.1.22:30 이름없음: 저 그런데.. 이따가 잘 사람 구했는지 물어봐도 돼요? ]

[23.9.1.22:31 효원: 잉? 되는데, 왜요?ㅋㅋㅋ ]

[23.9.1.22:31 이름없음: 왜냐면 진짜 궁금하니까… 구한다면 구해질까? 그런 궁금증… ]

[23.9.1.22:31 효원: ㅋㅋㅋ알겠어요. 그럼 좋은 밤 ]



이런 몸짱은 사진을 수백 장씩 날리다 보면 원나잇할 여성을 구할 수 있는 것일까? 이 남성은 본인의 이름도, 사진도 까고 정말 거침이 없구먼.


어느새 도착한 집구석은 적막했다. 옷을 갈아입고, 이를 닦고, 앞머리를 핀으로 고정시키고 클렌징워터로 화장을 지우고 이 지겨운 과정들이 오늘따라 녹록지 않았다. 지겹고 외로운 일상.


그와 대화한 지 한 시간이 지났을까? 과연 효원은 잠자리 상대를 구했을까?



[23.9.2.00:01 이름없음: 구했어요?]

[23.9.2.00:01 효원: 아니요. 어플 지워버렸어요.]

[23.9.2.00:02 이름없음: 우째요. 그럴 거면 그냥 나랑 술이나 마시지.]

[23.9.2.00:02 효원: 그러면 우리 동네 와요. 술 사줄게요.]

[23.9.2.00:02 이름없음: 저 화장도 다 지웠는데요. 님이 와요.]

[23.9.2.00:03 효원: 술 사줄 거예요?]

[23.9.2.00:03 이름없음: 아니요. 더치페이해요.]



나는 더치페이를 극도로 싫어한다. 그리고 응당 손님이 우리 동네에 오면 내가 사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어플남에게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모순적이고 상도에 어긋나지만 그냥 내 마음이 그랬다. 어플에서도 상도를 지키나요?! 



[23.9.2.00:08 효원: 그럼 오며 가며 택시비도 내고, 술값도 내라?]

[23.9.2.00:08 이름없음: 좀 경우가 없는 제안이긴 합니다.]

[23.9.2.00:09 효원: 저도 그냥 잘랍니다.]

[23.9.2.00:10 이름없음: ㅋㅋㅋㅋ 저 혹시 나중에 남자랑 자고 싶을 때 연락해도 돼요?]

[23.9.2.00:10 효원: 네, 연락해요.]

[23.9.2.00:10 이름없음: 알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23.9.2.00:10 효원: 좋은 밤~]



다음날 저녁, 어플에서 만난 동네 여자친구와 함께 술을 먹고 있었다.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나는 그에게 또 말을 걸었다.



[23.9.2.11:22 이름없음: 안녕하세요. 뭐 하고 있어요? ]

[23.9.2.11:22 효원: 안녕~ 그냥 집에 있는데요.]

[23.9.2.11:23 이름없음: 오늘은 잘 여자 안 구해요?]

[23.9.2.11:23 효원: 에이, 어제 어플 지웠어요.]

[23.9.2.11:24 이름없음: 저랑 술 마실래요? 저 지금 술 마시고 있는데.]

[23.9.2.11:24 효원: 오늘도 잘 생각은 없으시고?]

[23.9.2.11:24 이름없음: 아무래도 ㅎㅎ]



사실 생리 시작일이어서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었고, 그래서 연락하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23.9.2.11:25 효원: 그럼 잠은 자고 가도 돼요?]

[23.9.2.11:25 이름없음: 봐서? 일단 재밌게 놀아보고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중간에 님이 가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23.9.2.11:26 효원: 음, 그건 일단 알겠고. 가서 찌찌 만져도 돼요?]



푸흡. 찌찌라니 사실 내가 그의 찌찌를 만져보고 싶었다. 나보다 커 보이던 가슴.



[23.9.2.11:26 이름없음: 네? 찌찌요?]

[23.9.2.11:26 효원: 네, 찌찌.]

[23.9.2.11:27 이름없음: 만져도 되는데, 나 실제로 보고도 그런 말 할 수 있어요?]

[23.9.2.11:11 효원: 왜 못해요?]

[23.9.2.11:11 이름없음: 알았어요. 일단 오세요.]

[23.9.2.11:11 효원: 전화번호 뭐예요? 나 편하게 입고 갈게요. 12시에 출발해도 돼요?]

[23.9.2.11:12 이름없음: 010-xxxx-xxxx. 네]



이렇게 약속을 잡고 친구와 계속해서 술을 마시는데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가늠이 안 됐다. 초조한 마음으로 12시가 조금 넘었을 때즘에 친구와 헤어졌고, 나는 집에 돌아와 부산히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집을 치우다 보니 12시가 넘었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출발했다는 연락이 없었고, 나는 이대로 또 잠수를 당하는가 싶었다.


‘하긴, 얼굴도 안 봤는데.’


이해심이 넓어지고 있었다. 


띵-



[23.9.3.12:35 효원: 지금 출발할게요.]



‘왜 12시에 출발한다고 했으면서 늦는 거죠?’ 라고 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사이가 아니었다.



[23.9.3.12:35 이름없음: 네.]



우와 진짜 오는 건가?


[23.9.3.12:49 효원: 도착했어요.]



길을 가다가도 칼을 들이미는 묻지마 범죄가 난무하는 우리 사회에서 낯선 남자를 집으로 끌어들이는 너는 누구냐? 는 바로 나다.


뭔가 알 수 없는 무한한 신뢰, 그리고 원체 겁이 없는 성향의 콜라보로 그가 우리 집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도달했을 때,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을 때 너무 긴장되기 시작했다.

나는 신발을 신고 밖으로 현관문을 부리나케 열고 거의 뛰쳐나가듯 시피 서둘러 나갔다.


그때 그 떨림. 경연이를 처음 만났을 때 떨림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이 떨림은 특별한 것은 아니다. 지인이 시켜준 소개팅이건 랜덤가이 소개팅 어플이건 누군가를 처음 마주하는 그 떨림은 같다.


하지만 언제나 떨림은 설레는 일이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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