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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십일월 Dec 04. 2023

어플 몸짱남

소개팅 어플남

#4. 어플 몸짱남



‘역시 사귀자는 말은 아무런 쓸모가 없어!’


분한 나는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했지만 볼에는 닭똥같은 쓸모없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7년 전에 만난 한 남자가 그랬다. 한 달을 꼬박 만났지만 내게 사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 말고도 만나는 여자가 있는 건지, 정말 그냥 사귀고 싶지 않아서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우리 사이가 뭐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는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진부한 여자처럼 보일까봐 꾹 참고 묻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만난 지 2개월이 지난 후에야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알게 되었다.


그는 친구에게 걸려온 친구에게 여자친구와 데이트 중이라 말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그의 여자친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주 나중에 우리가 만난 지 2년 됐을 때야 물어봤다.



“왜 처음에 사귀자고 말하지 않았어?"

”그런 게 의미가 있나? 이렇게 항상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중요한 거야.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귀는 6년 내내 딱 두 번 빼고 주말 금, 토, 일 항상 빠짐없이 나를 보러 왔던 사람. 내가 불안정한 삶을 살 때 물심양면으로 내 곁에 있어주었던 사람.


말보다 행동을 보라던 어른들의 말을 이해하게 만들어주었던 사람이었다. 열심히 사랑했고 그래서 미련이 없었던 고마운 연애였다고 항상 생각했다.


이 연애가 나를 어떻게 형성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

.

.



하루아침에 잠수를 탄 경연이의 행동에 나는 매우 분노했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메시지조차 읽지를 않아 무언가를 시도할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굉장히 화났던 지점은 우리의 ‘대화'이다. 이만큼 말이 잘 통하고 서로 미주알고주알 떠들고 싶었던 상대가 있었다가 사라지면 얼마나 허무할까?


우리는 숱하게 이 주제에 대해 대화했고 이 인연이 잘되지 않았을 때의 쓸쓸함을 상기했다. 짧지만 강렬했던 지난 4일 간의 대화를 이렇게 한순간에 버린다고? 그렇다면 모든 게 연기였던 걸까? 이렇게 하찮았던 것인데?

그럴 리 없어.


아니, 그럴 리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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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에 ‘남자와 나누는 운명 같은 대화를 믿지 않는다’라는 일기를 쓴 적이 있다.


토익학원에서 만났던 남자와 운명을 생각했다. 미감도 비슷했고 공교롭게 취향도 일치했다. 또한 내 소울메이트인 것처럼 내 마음을 헤아렸고  내가 사는 동네에 와서 항상 나와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는 했다.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된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어느 정도 인생의 짬이 찼을 때 돌이켜보니 자연스러웠던 게 아니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내 주위를 서성이며 내 표정을 읽고, 매 순간 나의 존재를 알아차려 기회가 생겼을 때 말을 걸어 내 생김새나 옷매무새, 나의 음성을 칭찬해주었고 나는 그런 사탕발림에 홀딱 넘어가버린 것이었다.


관계가 진전되고 잠자리를 몇 번 갖고 나니 그는 무참히 연락을 끊었는데, 나는 그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저 나에게 잘 보이려고, 비위를 맞춰 환심을 사려던 수컷 공작새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었다. 어린 나의 순진무구함이 운명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 그의 진심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기분 좋은 기억은 아니었기에 이 사건을 교훈 삼고 남자들을 경계해야지라고 마음 먹었지만 붕어와도 같은 내 기억력과 타고난 순진함은 매번 나 자신에게 상처를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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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이 핸드폰이 고장 난 건 아닐까?  그러면 카톡으로 연락을 했겠지.


아니면 뭔가 전화를 받지 못하는 상황인 걸까? 나는 친구를 시켜 경연의 번호를 알려주었고, 친구는 경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연은 모르는 번호인 내 친구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면 뭘까? 뭐긴 뭐겠어! 나도 참 웃겨. 경연이가 모르는 번호 전화를 뭐 안 받으면, 받으면 뭐 어쩔 건데? 그냥 내 전화를 안 받는데 그게 뭔 소용이냐고.


나는 시시각각 여러 현타를 맞으며 그에게 애달프고 지질한 문자를 보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야? 왜 그러는 거야? (14:24 안 읽음)]



다음 날.



[말로 하면 안 돼? 이렇게 그냥 가는 게 어딨어 (18:31 안 읽음)]



그다음 날에는 친구 시라에게 어떻게 하면 답장을 받을 수 있을까 상담을 받으면서 문자를 썼다.



[너 우리집에 뭐 두고 갔어 (21:10 안 읽음)]



‘안 읽음,


안 읽음,...


안 읽음!!!!!’



시발. 나는 유령이 된 그를 떠올리며 아주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여름은 절정으로 뜨거워졌고, 그 열기에 나는 더위를 먹은 것 같았다.


그렇게 허튼짓 한 지가 3주 정도 지났을 무렵,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서울에서 재밌게 놀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밤 10시쯤이었지만 나는 아직 쌩쌩했다.


거나하게 취해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오늘 만난 친구들은 술을 즐겨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터덜터덜 진동이 느껴지는 지하철에서 스멀스멀 반짝이는 야경이 모자이크 된 듯 내 눈동자를 스쳐지나갔다.

갑자기 감당하 수 없는 엄청난 외로움이 해일처럼 밀려왔고, 그 외로움에 허덕일 내 모습을 상상하니 무력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폭주하기 시작했다.


다시 소개팅 어플인 ‘나톡'을 깔았다.


움직이는 지하철은 계속해서 나의 위치를 바꾸었고, 거리순마다 달라지는 남자들의 프로필이 어지러웠다.


‘‘안녕하세요”로 시작하는 수십 개의 메시지들이 오기 시작했다. 정신이 아득했다. 


‘시발 이 짓을 또 언제 하고 자빠졌냐.’


그렇게 나는 어플에서 제2의 경연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어플을 지우려던 찰나,


‘안녕하세요'가 아닌 ‘사진'으로 시작하는 메시지가 왔다.


뭘 보여줄까?


호기심에 누른 채팅창에는 구릿빛 피부가 밝혀주는 선명한 식스팩 복근.


근육돼지가 아닌 체지방 10퍼센트 미만의 정말 예쁘게 잘 정돈되고 잘 짜인 몸을 가진 말 그대로 ‘몸짱’의 사진이 있었다.


남자랑 자려고 어플을 킨 것이 아니었지만, 도저히 말을 걸지 않고는 못 배길…


왕 왕 몸짱남이었다.


[나: 트레이너예요?]

[건오: 아니요, 그냥 취미예요. 하는 일은 따로 있고. 어디 살아요? 우리 진짜 가까운 거 같은데.]

[나: 아, 저 지금 지하철이에요. 막 지나가는 중. 근데 가깝긴 해요.]

[건오: 술 마실래요?]

[나: 네!]

[건오: 카톡 아이디 알려줄게요.]


일사천리네. 이런 거 많이 해본 건가?

나는 카톡을 켜 그의 아이디를 검색했다. 이름은 ‘효원'이었고, 프로필 사진을 클릭했다.


다양한 표정이 담겨 있는 인생 네 컷과 수영장에서 찍은 멋진 몸이 부각된 수영복 사진,

주방에서 찍은 듯 보이는 앞치마를 입은 여러 사람들 가운데 가운데에 있는 그의 단체사진. 


‘요리사인가?’


호감상, 그의 얼굴은 어찌 보면 남자로서 잘생긴 축에 들 수도 있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자기 사진을 다 오픈하고 이름도 깔 수 있는 거지?’


반면 나의 카카오톡 이름은 ‘이름없음'이었고, 프로필 사진 14개는 내 신상과 관련 없는 웃긴 짤이었다.


원래 카카오톡을 잘하지 않았다.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이 내 번호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내 존재의 유무를 알고 있는 것이 싫어서 이름도 지워버렸었다.


나는 천천히 그의 프사를 살펴본 후 카톡으로 말을 걸었다.


노란색 메시지가 파란 화면에 올라갔다.


[23.9.1.22:10 이름없음: 안녕하세요?]

[23.9.1.22:10 효원: 그쪽 사진도 볼 수 있어요?]

[23.9.1.22:11 이름없음: 음, 잠시만요.]


나는 경연이에게 보냈던 뒷모습이 나온 전신 사진과 수영장에서 찍은, 수중에서 비키니를 입고 왼쪽 어깨와 팔과 왼쪽 얼굴 반쪽만 나온 셀카 사진을 보내주었다.


[23.9.1.22:14 효원: 에이, 이런 거 말고 그냥 시원하게 얼굴 까줘요. ]

[23.9.1.22:15 이름없음: 저 넙치 같이 생겼는데... ]


프사로 도배되어 있는 효원을 보니 나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니겠는가. 물론 복수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큰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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