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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십일월 May 28. 2021

60학번 이명준과 13학번 십일월

최인훈의《광장》



누군가 내 블로그에 '최인훈'과 '광장' 키워드로 접속한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도 한번 검색해보았다. 그러던 중 위의 기사를 발견했다. <최인훈 소설 '광장' 주인공 모델 현동화 별세>...

'광장' 이명준의 모델이 있었다고?! 그래, 있었겠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광장의 덕후로서 난 함참 부족하구만. 더군나나 나와 같은 지역에서 별세하시다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밑에 글은 아~주 예전에 《광장》을 읽고 썼던 글이다.








소설가 최인훈의 타계 소식을 듣고, 동지를 떠나보낸 기분에 마음 한편이 먹먹했다. 1936년에 태어난 사람을 1990년에 태어난 필자가 ‘동지’라고 이름 붙이면 누군가는 건방지다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항상 그의 작품에서 나를 보았고, 나의 친구들을 보았다. 그 나이에만 할 수 있는 생각들과 행동들이 있다고 어른들이 말하지 않았던가. 나 역시 60년대에 대학교에 다녔던 『광장』의 ‘이명준’과 『회색인』의 ‘독고준’과 90년대 지식인을 표했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구보 씨’를 보며 나와 닮아있다고 생각하여 그 시절, 최인훈의 작품들을 항상 팔꿈치에 끼고 다녔나 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최인훈의 『광장』을 과거 입시교육 때 입이 닳도록 외운 ‘광장’과 ‘밀실’의 대립 또는 남북 분단의 시대적 관점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광장의 주인공인 인간 ‘이명준’의 캐릭터에 오롯이 집중하려고 한다.


글은 필자가 이명준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된 이유를 소설 속 구절을 인용해 이명준이 삶을 대했던 태도와 고뇌, 그리고 이명준이 맺은 관계와 죽음을 순서대로 논의할 것이다.




시대가 변해도 이명준은 변하지 않는다



『광장』은 주인공 이명준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젊은 그의 어리숙함을 보며 나는 자연스레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기이한 상황을 마주하며 느끼는 것들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이를 삶의 이치에 적용하려하고, 그 시도를 호들갑스럽지 않게, 담담하게 표현한 이명준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요즘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 허상과도 같은 잡념이라 치부되고, 형상없는 미래에 대한 이정표만 보며 달려가기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명준의 고뇌가 더 반가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따금씩 명준의 고뇌와 행동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조차 모르는 어리숙한 그의 모습을 볼때면 너무 답답하기도 했다. 모순적인 헛똑똑이라고 해야하나? 하지만 나또한 젊은 날에 내가 하는 행동에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 몰랐으니, 마냥 팔짱을 끼고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그의 고뇌는 중∙고등학교 때 다루게 되는 한국문학들의 시대적 배경-일제강점기와 남북전쟁, 그리고 전쟁 이후의 빈곤한 삶과 폭력적인 일상과는 달랐다. (필자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웠던, 한국문학에 선입견을 품게 된 나는 어린 마음에 한국문학에서 벗어나,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스스로의 성찰이 담긴 서양의 고귀하고 우아해 보이는 고전소설에 눈을 돌렸었다.) 우연히 펼쳐보게 된 『광장』은 필자가 읽은 사르트르의 『구토』나 『말』보다 더 진솔하고 가슴 떨리게 읽을 수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서양의 고전 소설이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이유는 시대적 배경이 달라도 지금과 통용되는 걱정과 생각들이 같기 때문이 아닌가? 최인훈의 소설들은 그런 점에서 감히 우리나라의 고전 소설 혹은 철학서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명준의 삶의 태도와 고뇌, 이명준의 모순은 우리의 모순


명준은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태식과 영미에 대해 돈만 많고 한낮 철 없는 대학생이라고 끊임없이 평가질을 해댄다. 또 교수의 강의는 짐짓 낮추어 보고, 다니던 대학의 학보사에 투고해 당선된 시를 학생 놀음에 치부하며 펼쳐보지는 않지만, 팔꿈치에 신문을 끼고 다니는 모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 후 그들은 툭하면, 고독해서 그러는 거야, 엉뚱한 데다 그 말을 쓰곤 했는데, 버스 꽁무니를 바싹 따라가는 자전거 선수이든, 로터리에서 교통 정리하는 순경의 경우든, 국산 기관포로 강냉이를 튀기는 아저씨의 경우든, 모조리 그럴싸한 데는 놀라고 만다. 한 번은 역시 둘이서 길가에 늘어앉은 사주쟁이들 옆을 지나가다가 명준이……. "고독해서 그러는 거야.”…….길가였는데도 그들은 깔깔대고 웃었다.”


태식이가 고독에 대해 고민하는데 명준은 이에 농을 친다. 이때만큼은 지금의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슬픔을 웃음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현실도 마찬가지다.


“그 마음을 다 파헤치면 뜻밖에 섬뜩한 무엇이 튀어나올 것 같아 두루뭉술한 손길로 얼버무려온다…… 불현듯 오늘밤 선장이 여자 이야기를 꺼내면 어쩌나 싶었다. 남의 속 얘기를 듣고 그것을 갚자면 자기 속을 털어놓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사람은 부스스한 옷매무시나 벙벙한 낯빛으로, 자다 깬 사람은 알 수 있는 법이지만, 잠옷이 없는 이 짐승은 그것도 아니고, 어느 모로 뜯어보아도 자다 깬 사람이 가지는 그 흐트러진 낌새는 찾을 수 없다.”


명준은 위에 인용된 구절처럼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고, 행동을 제지하고, 표현하기를 멈춘다. 이를 보면 울분의 이유도 모른 채, 생각지도 않은 채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와는 다르게 보인다. 이명준은 소설 후반부까지 사람들간의 주고받는 것에 대한 마음을 계속해서 늘어놓는다. 인간과 사물에 대한 작가만의 섬세한 감정 묘사는 독자들이 '자기반성'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이명준의 관계



마흔 살이 넘은 고고학자이자 여행가인 정선생과 젊은 철학도 이명준의 관계는 참 흥미롭다. 이명준은 정선생이 들여온 미라를 보기 위해 그의 집을 찾는다. 명준은 정선생을 스승으로 여기지만 반대로 정선생은 명준을 자신의 제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이를 더 먹었다고 생색을 내거나, 가르치려 하거나 하지 않기에(속된 말로 꼰대처럼 굴지 않았기에) 둘의 이상적인 관계가 지속되었다. 또 정선생은 명준의 젊음을 찬미해주고 진심으로 응원해준다. 그래서 명준은 편한 마음으로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열분을 정선생에게 표출한다.


“한국 정치의 광장에는 똥오줌에 쓰레기만이 가득합니다……. 한국 경제의 광장에는 사기의 안개 속에 협박의 꽃불이 터지고 허영의 애드벌룬이 떠돕니다. 문화의 광장 말입니까? 헛소리의 꽃이 만발합니다…… 그들이 가장 아끼는 건 자기의 방, 밀실뿐입니다.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죽었습니다…….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광장은 비었습니다.”


자신의 말을 듣고 어떠한 반박이나 동의도 하지 않고, 듣기만 하는 정선생에 명준은 실망한다. 이명준은 정선생을 스승이 아닌 친구로, 스승이라는 윗 계단을 밟고 있다고 생각했던 정선생을 친구라는 한 단계 낮은, 아래 계단으로 내려왔다는 표현을 쓴다. 그리고 허전함을 느낀다. 명준은 자신의 머릿속에 심어놓은 둘의 서열에 심취해, 자신을 부수지 않은 정선생에게 실망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대목에서 명준이 안타까워졌다. ‘명준이 자살하지 않고 생을 더 보냈다면 자신이 부순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다는 걸 알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세상을 살면서 두어야 할 것은 내 위라고 생각하는 선생보다는 나와 동등한 선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걸 친구라고 부른다.


자기 스스로 부순 우상을 대하는 건 어찌 됐건 간에 착잡한 일이다. 왜냐하면 결코 자신보다 더 대단한 사람은 없다고 깨닫는 것은 미천해 보이는 나 자신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희망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준은 또한 사랑을 통해 성장해가는데, 필자는 『광장』은 실상 연애소설이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들었을 정도였다. 작가는 사랑의 빠진 명준을 심도 있게 그린다. 사랑이라는 새로운 감정의 경험을 통해 한 단계 더 발전해나가는 명준의 고찰이 이 책에서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었다.



이명준의 사랑



“바라건대 어떤 여자가 자기에게 움직일 수 없는 사랑의 믿음을 준 다음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자기는 아무 짐도 없는 배부른 장단만을 가지고 싶다.”


이 솔직한 심정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한없이 나태하게 굴면서 그저 아무런 대가 없이 받기만 하는 일을 누구나 한번쯤 상상했을 것이다.


또 그의 사랑은 여느 젊은이처럼 급작스럽게 불타오르는데, 어느 날은 갑작스레 윤애가 있는 인천으로 달려가서는 윤애에게 말한다.


“윤애 씨 집으로 온 게 아니구, 윤애 씨한테 온 겁니다.”


이 장면에서는 항상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성에게 열심히 입을 터는 지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머리 굴리지 않아 솔직하다. 이처럼 명준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들에게 항상 진실했다. 가끔 철없는 아이처럼 행동하고, 아직 익지 않은 열매처럼 시게 굴기도 하지만 영미의 오빠이자 친구인 태식이 거짓말을 섞어 날마다 애인을 바꿔대는 꼴을 보며 순정을 논하며 진정한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 끊임없이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을 안다고 말할때, 그건 얼마나 큰 잘못인가. 사람이 알 수 있는 건 자기뿐. 속았다 하고 떼었다 할 때, 꾸어주지도 않은 돈을 갚으라고 조르는 억지가 아닐까. ‘사랑’이란 말 속에, 사람은 그랬으면, 하는 바람의 모든 걸 집어넣는다. 그런, 잘못과 헛된 바람과 헛믿음으로 가득 찬 말이 바로 사랑이다……손이 닿을 거기에 다소곳이 선 ‘물자체’였다.”


물론 이명준의 고뇌가 모두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현시대에서 이명준을 읽는다면 이명준의 여권 의식은 한참 부족해 보인다. 영미와 윤애, 은혜를 대하는 방식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보다는 여자에 대한 갈망과 소유로 생각하는 면이 아쉽다. 그리고 마치 여성의 존재가 남자를 위해 존재하는 대상으로 인지하는 것도 탄식이 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이명준 자신도 그것이 잘못된 것을 인지한다는 점이다.


“그녀가 고분고분하면 좋아라 하고, 마다하면 비로소, 그녀도, 움직이지 않는 물건이 아니고, ‘사람’ 하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람’과 부딪친 것을 창피를 당했다고 여겼다니, 남 위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었을까. 살을 섞는 데서 그녀가 어느 만큼 즐거움을 가지는지, 그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사람에 대한 고뇌는 결국 같은 길을 걷나 보다. 이명준이 영미와 은혜, 영미를 진심으로 인간으로 대했다면 훨씬 덜 외롭지 않았을까.


이런 점을 비추어볼 때 이명준이 마냥 세련되었다고만 할 수 없지만, 그 시대에 이명준의 삶을 써 내려간 작가 최인훈은 세련되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나는 그가 지금의 사람들보다 더 세련되고 교양있다고 생각한다.


또 이명준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빼고서는 이 책을 논하는 건 정말 의미 없는 일이다. 명준은 아버지를 그리워하거나 보고싶어하는, 아쉬운 나이는 아니라 생각한다. 자신과 어머니에게 말한마디 없이 월북한 아버지에게 정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대남방송에 얼굴을 비친 아버지 때문에 끌려가게 된 경찰서에서, 형사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며 아버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새 아버지가 명준의 마음이라는 밀실에 들어선다. 명준은 월북 후,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그 잠깐동안 아버지에게 울분을 토해낸다. 그 후 자신이 자는 방에 들어온 아비가 자신의 이불깃을 여며주는 것에 대해 입술을 꼭 깨문다. 이런 사랑밖에 내줄 수 없는 아버지가 나약하다고 느껴졌을까? 아니면 포기했을까?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명준은 소설의 막바지로 가면 갈수록 한없이 나약해진다. 동굴에서 은혜를 기다리며, 윤애를 안은 태식을 내려치는 꿈을 꾸며, 정선생네 집에서 본 관속에 갇힌 미라를 떠올린다. 아마 그 미라는 명준이었을지도 모른다. 몸 안에 아무것도 없이, 공허하게 바사삭거리는 겉면이 명준인 것이다. 그런 명준이 중립국에 다달았을 때, 배를 탄 내내 자신을 따라다니던 얼굴 없는 그림자는 큰 갈매기와 작은 갈매기로 나타나 그의 마지막과 함께했다. 하지만 사실상 자기 자식을 잉태하고 전사한 은혜와 뱃속에서 죽어버린 딸아이, 명준의 죄책감이었을 것이다.


선장이 처음 뱃길에 올랐을 때 따라오는 갈매기가 자신의 옛 연인이라 운을 띄는데 나는 처음에는 그저 시답지 않은 뱃사람의 넋두리로, 소설 도입부에 넣은 유치한 상징으로 생각했었는데 명준의 마지막을 장식할 줄 몰랐다. 그리고 어느새 ‘갈매기’의 행방이 궁금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명준이 왜 중립국으로 가려고 했는지 우리는 그의 죽음 앞에서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모호한 이정표라도 당장의 목표가 없다면 정해진 이정표를 따라가게 되어있다. 하지만 명준의 공허한 밀실은 더는 의미가 없게 되었고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었다. 모호한 이정표마저도 그에게는 없던 것이다.


나는 소설이 마지막을 향할 때쯤 이명준이 곧 내가 되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많은 생각의 나열로 자칫 지루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은 섣부른 판단이었을 뿐, 삶에 대한 고민이 가득한 명준의 고뇌는 그저 지루한 것으로 치부되기에는 그 흡입력이 대단했고, 다른 시대를 사는 나를 단숨에 이명준으로 만들어주었다. 이처럼 13학번이 본 60학번의 기행은 지금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명준이 죽음이라는 큰 바다에서 잠시 허우적대면서 나는 무얼 깨달았을까. 모든 것이 처음이고, 이제는 조금이 익숙해졌다 해도 아직은 미숙하기만 한 나를 제3자의 시선에서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부디 이명준이 자신의 아버지인 최인훈 작가와 함께 행복이 노닐었으면 좋겠다.







광장/구운몽

저자: 최인훈

출판: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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