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는 사람

feat. 이력서의 늪

by 십일월



IMG_0360.jpg?type=w1 글/그림 11월


이력서는 내게 참 잔인한 서류 중 하나다. 삶의 경험을 오로지 회사명과 수치(근속연수)로 나타내다니... 그래도 다른 방도가 없으니 이것저것 적는다.


‘잡지회사 인턴 9개월, 영화의상 팀원 6개월, 웹툰회사 편집팀 디자이너 7개월, 출판사 인턴 3개월, 유통업 회사 디자이너 8개월.’


수많은 아르바이트 경험들은 제외했다. 소속됐던 곳들을 차례로 살펴보니 근속연수가 채 1년이 안 된다. 영화 의상팀에서 일할 때 맡은 영화는 사극이었는데, 사극은 현대물과 달리 영화판에서 편당 2년 경력으로 쳐준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안될까요?…라고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을 수도 없다. 따라서 이력서엔 경력으로 칠 수도 없는 짧은 경험들이 다수요, 분야도 중구난방이다.


내 이력은 (당연하게도) 취업을 위한 것들이 아니었다. 작가가 꿈이었던 나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했다. 다채로운 소재와 깊이 있는 감정선... 다양한 경험은 나의 소산이자 작품의 소산이었다. 따라서 흥미로운 것이 생기면 물불 가리지 않고 붉은 천만 보고 향하는 투우처럼 달려가 몸소 경험하기 바빴다. 하지만 그것들을 평생의 업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터라, 직업의 형태와 업무의 사이클을 알게 될 때쯤 일을 그만두었고, 다시 습작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업 작가가 되지 못했다. 나는 최선을 다했는가? 그 노력이 미비해 꿈을 이루지 못한 거 같아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의 노력을 수치로 따져보았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싸우던데, 그에 비해 나는 너무 느긋하게 살아온 거 아닐까? 내 기량을 75% 정도만 발휘하면서 산 기분이 들었고, 친구에게 선포하듯 내 포부를 전했다.


“앞으로 정말 열심히 살 거야. 100% 노력해서 살 거야. 너무 안일하게 살았던 거 같아.”


친구에게 조언을 구한 것도 아니었다. 남한테 이를 알리면 하는 척이라도 하겠지라는 마음으로 통보나 다름없는 혼잣말같은 것을 했다. 친구의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딱히 대답할 말도 아니지 않는가? 돌아오는 말을 굳이 생각해보자면 ‘그래, 파이팅!’ 정도? 하지만 친구는 뜻밖의 말을 건넸다.


“아니, 왜 75% 정도로만 살면 안 돼? 그냥 살아!”


-


나는 현재 작업실에서 만화를 그리고 글을 쓴다.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고 있다. 문득 노력이 부족한 것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면 그 자리에서 더 열심히 하려고 한다. 이런 노력을 수치로 나타내면 100%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노력에 대한 '100%의 확신'은 있을지는 몰라도, '노력'이라는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단어를 숫자로 수치화 시킬 수 없다는 건 사실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다. 내 인생을 종이 한 장에 담을 수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과거에 행했던 노력을 돌이켜 굳이 수치로 따져보면 아마 100%의 노력이 맞는 것 같다. 항상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다. 영화팀에선 월 오십만 원을 받으며 하루에 세 시간씩 자면서 일했다. 그나마 쉬는 날에도 만화를 그렸다. 잡지를 만들 때에는 마감이 다가오면 항상 밤낮없이 일했다. 동료들과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매우 뿌듯했고, 일이 즐거웠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로 순간마다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항상 최고의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나는 세상의 이치를 간과한 채 이력서에 남길 몇 줄의 경력때문에 느긋하고 낙관적인 성향의 나를 게으르다고 잘못 평가한 것이다. 내 속도로, 나답게 가는 것이, 제일 중요한 거 아닌가? (물론 지금까지도 이게 자위인지, 아닌 지는 모르겠다.) 여유로운 마음을 갖는 것과 열심히 사는 것은 다르니까.


위의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냥 살아!’라고 했던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사실 그 당시엔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내가 나를 의심하고 있을 때, 친구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믿어준 것이었다. 그냥 지금 살던 대로 살면 된다고, 잘하고 있으니 지금처럼 계속 노력하라고 말이다. 정말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건 어려운 일이라 하는데, 나쁘지 않은 평가였다. 오히려 나를 향한 믿음이고 위로였다.


비록 이력서에 있는 나는 구색을 갖추지 못한, 내세울 거 하나 없는 인간일지도 모르지만, 이 정도면 된 거 아닌가? 내 인생의 여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응원도 받고 동시에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난 꽤 괜찮은 인간으로 타인의 기억 속에 남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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