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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브 Dec 12. 2022

익선동 Revive

서울 일탈

일을 마치기 약 10분 전, 창문 밖으로 사진 플래시가 터지는 듯한 불빛을 오른쪽 눈이 감지했다. 저녁 약속 장소로 출발해야 하는 시간이 촉박하게 다가오고 있는데 아직까지 동료들의 이런저런 질문에 묶여 있었다. 그걸 건성으로 들으며 핸드폰으로는 약속 장소까지 최적 경로를 열심히 찾아보고 있는데 또다시 플래시. 그리고는 우르릉 쾅쾅. 마치 태어나 처음으로 듣는 듯할 정도로 심하게 화난 천둥소리가 뒤따랐다. 아, 천둥번개 치는 거야? 마른 가지처럼 하루하루 보내다가 이렇게 신경 쓰이고 설레는 미팅이 너무도 오랜만인데 천둥번개라니! 


창문 밖을 보니 굵은 비도 내리는 것 같아서 반강제적으로 결국 운동화를 신고 나왔는데 밖에 나오자마자 바람에 휘둘리는 우산을 바로 잡으며 운동화 선택에 안도가 되었다. 서울이 언제부터 이렇게 캄캄했지? 아직 저녁 8시 반인데 거리가 이렇게 어둡고 한적하다니. 굵은 빗방울만이 유일하게 유동하고 있었다. 시간 여유가 없어 빠른 걸음을 하는데 그 어둠 속에서 다시 천둥번개. 도로의 적막함과 빗물의 축축함과 천둥의 호통과 번개의 두려움이 오늘 저녁의 약속을 더욱더 애틋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약속을 취소해야 하나. 아니길 바라면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미리 알아둔 최적 경로는 낯선 동네 거리의 어두움과 근처의 높은 간선 도로의 위엄 그리고 빗방울의 불편함으로 인해 전혀 따를 수가 없게 되었다. 택시를 잡으려 했으나 거리의 한 남자가 이미 잡히지 않는 택시를 잡으려 애쓰는 것을 보고 너무 빠른 시간 동안 스무 가지 옵션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정하지 못한 채 몸은 어딘가로, 불빛이 조금 더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조금 더 있는 곳으로 일단 향하고 있었다.


- 비가 오네요. 

- 다음에 만나야 할까요?

- 막 장소에 도착했어요.


다행이다. 약속이 미뤄지지 않았어. 예상보다 늦어졌지만 큰길로 접어드니 또 다른 경로는 생겼다. 악한 기상 상태와 도시의 음침함 때문에 혼이 빠져 길에서 물건도 잃어버린 것은 버스에 앉자마자 알게 되었다. 오늘 저녁 약속이 이 정도 가치는 있는 모양이다. 이동 중에 음악에 정신을 맡겨 몽상에 빠지려고 했으나 잃어버린 것이 무선 이어폰이니 그마저도 빼앗겼다.


생각해보면 만난 지 아니 연락조차 안 한 지 너무 오래된 사람이라 이 나이가 되어도 어색하면 어쩔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흥분과 설렘에 엉켜서 마음에 덩어리가 되었는데 버스에서 음악 대신 약 20분 후에 만날 사람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동안 시간의 흐름이 무색하게 마음의 덩어리가 녹아져가고 있었다. 잘할 수 있을 거야. 왠지 모르겠지만 항상 이렇게 잘 해내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마음속으로 잘 지나갈 수 있을 거야라고 토닥거리는 버릇이 있다. 무엇을 잘한다는 것인지, 잘한다는 게 무엇인지. 사회 초년생에 만난 사람을 강산도 변할 만큼 오랜 세월 후에 다시 만나는 것에 잘한다고 할만한 기준이란 게 대체 무엇이길래. 아무도 이곳에 억지로 나가라고 하지 않았고 심지어 먼저 제안을 한 것이면서도.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이면에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시간의 흐름으로 인한 실망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두려움이 가장 큰 것일 게다. 양쪽 모두에게. 


버스에서 내리니 단편의 심리 공포 영화를 보고 나온 기분이다. 거리가 달라졌다. 비가 개었고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다. 대중교통에 기댄 이동이 끝났고 약속 장소까지 내 다리를 이용한 나머지 5분 정도의 거리만이 남아있었다. 공기가 상쾌해졌고 걱정보다는 떨림이 앞섰다. 내려서 술집까지 걸어가는 좁은 율곡로 길에는 모텔이 꽤 가득했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두 남녀를 스쳐 지나가는 동안 그들의 짧은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 (남) 아, 이거 가는 방향이 틀려서 작업도 못 걸겠네요 허허.  

- (여) 하하, 가는 방향이 틀려서요?

- (남) 아니, 가는 방향이 틀리니까 작업을...

- (여) 아니, 가는 방향이 틀려도 더 작업을 걸어야지요 호호.


익선동 도착지에 거의 다 왔기에 만날 상대가 어느 테이블에 앉아 있을까 찾아보며 거리의 이 두 남녀는 그 이후 근처의 모텔 어딘가에 들어갔을 거라고 예상해봤다. 멀리서 살짝 바라본 그 사람은 세월이 무색할 만큼 거의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부쩍 이른 시간부터 어두워진 서울의 불빛 때문일까. 자세한 디테일은 굳이 보지 않아도 돼. 중요한 것은 윤곽과 내면과 대화 사이사이에 암묵적으로 지나가는 짜릿함이다. 그 사회 초년생 때에도 이 사람과 또 다른 친구와 트리오로 밤늦게까지 같이 술을 마시고 돌아다닌 것도 모두 이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윤곽이 좋았고 내면이 달랐고 정답을 알고 싶지 않은 내시적인 작업이 있었다. 세 번째 이유는 혼자의 환상일 가능성이 있으나 무엇보다 그 환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일단은 있는 듯 없는 듯한 어색함을 누르려면 빨리 적당량의 알코올 섭취가 필요하다.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겠는 이 사람과의 약 두 시간 정도의 만남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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