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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아있는 무대 Sep 20. 2019

내 기분 왜 이래?

기분에 대한 책임 권한 묻기

기분은 본인의 것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크게 신경을 많이 썼던 부분은 타인의 기분이었다. 상대 기분이 나빠지는 모습을 보면 크게 죄를 지은 것 마냥 하루 종일 미안해했다. 모든 게 다 내 잘못이고 내 책임, 내 탓이오 했다. 반대로 기분이 좋아진 상대를 보면 안도했다.

그래서일까 평소 행동은 서비스직 하듯 움직였다. 상대 기분을 살피느라 눈치를 보며 반응한 것들이 센스 있다는 칭찬으로 돌아왔고 다운된 기분을 달래 주느라 했던 경청과 유머는 상대가 나를 찾게끔 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편한 남사친으로 여사친들의 고민 듣는 상대역을 많이 했다. 정말 실속 없는 일이다.

타인의 기분 변화를 크게 신경 쓰다 보니 공적인 자리인 일처리 과정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혹여나 기분 상하진 않을지 전전긍긍하는 태도가 기본자세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를 위하는 시간은 있어도 스스로를 위하는 시간은 없던 탓에 스스로를 속이며 인간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다 어느 날 터지면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갑자기 잠수를 타거나 알지 못하는 말로 화를 내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기분은 본래 본인의 것이다. 이를 알고 깨달은 순간부턴 자유해졌다. 내가 만든 감옥에 갇혀 기분이 쉽게 쉽게 변해버리는 상대를 보며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힘에 부쳐 지쳤으니 말이다. 어떤 상담이론을 빌어 말하면 어린 시절 발 달기에 정서 발달이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한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혹은 관계 트라우마 환자의 반응이었을 것이다.

사건이나 일에 대한 책임과 권한에는 명확한 경계가 있지만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기분, 상징성이나 은유적인 것들은 경계가 없다. 자기 것인데도 타인을 투사의 도구로 보고 착각하기도 한다. 상대 기분을 조작하려 하고 억지로 좋은 상태로 만드는 일만큼 감정 소모에 적합한 일은 없다.

주체성 있게 자기의 기분과 느낌을 책임지는 게 가장 취약한 부분이 교회 봉사현장이 아닐까 싶다. 신앙을 곧 완벽하고 좋은 상태라고 교육받은 사람이 많을수록 그렇지 못한 모습의 사람은 본인을 숨기게 되어있다. 또, 마음 약한 상태를 숨기고 씩씩하고 빠릿빠릿하게 일처리 할 것을 요구받는 자리라면 기능적 역할은 잘 수행할지 몰라도 존재 자체를 꺼내 보이기란 쉽지 않다.

이제는 내게 기대를 하거나 요구를 한다면 내 것으로 가져와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확인한다. 만약 거절해야 한다면 정중하게 거절한다. 실망하는 기분은 상대의 것이니 개의치 않는다. 기분이란 2000원짜리 마카롱에도 변하는 아주 단순한 것이다. 기분은 본인의 것이니 본인 것을 잘 챙기면 상대의 것도 보이게 되어있다. 상대의 기분을 헤아리느라 감정 소모에 지쳐버린  사람들을 만나며 느끼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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