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인식하는 나

by 무구의식

순수의식(또는 본질)이 ‘물’이라면 영혼은 특정한 ‘강이나 호수’이고, 성격은 그 ‘표면의 물결’이나 강 안에 있는 ‘얼음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P. 47



그녀가 정식으로 첫 직장을 얻은 건 25살이 된 늦가을 쯤이었다. 그쯤 그녀가 직장의 한 선배에게 이런 말을 해 놀림을 받은 적이 있었다.

“전 아직 ‘애기’니까요”

앞뒤 말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였고, 그것이 첫 걸음마를 뗀 아가처럼 느껴져 나온 말이라 생각했다. 그 말이 상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튀어 나오는 실언에 그 사람의 무의식에 박힌 언어와 생각이 베어 있다는 걸, 그녀는 나중에야 알게 됐다.


말에는 무서운 힘이 담겨있다. 자신을 ‘아가’로 지칭한 그녀는 오랜 시간 스스로를 ‘애’로 인식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을 돌봐줄 누군가를 기다렸다. 자신을 돌봐야 할 부모가 제 임무를 하지 않는 것에 마음에 앙금이 생겼다. 나긋나긋 친절하게 하나 하나 알려주지 않는 세상에 화가 나고 분통이 터졌다.

‘대체 이렇게 약한, 어린아이같은 나를, 왜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거지!’


20대와 30대의 차이는 업무가 손에 좀 더 익어 능숙해진 ‘감’으로 체감했다. 그녀는 그걸 성장으로 여겼을지 모르겠다. 직장에서 시행착오가 줄었고, 배우던 사람에서 알려주는 사람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그녀는 누군가 자신에게 그렇게 알려주기 원했던 것처럼, 아주 세세하고 치밀하게 후배에게 일을 알려 주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 속에 ‘자만’이 씨앗을 터뜨렸다.

‘내게도 이렇게 해줬어야지!’

자신이 방식(만)이 옳다고 믿었고, 자신의 방식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족해 보였다. 마음 속에 비난들이 가득 찼다. 타인을 향하는 줄로만 알았던 비난이란 화살은 양끝 모두에 뾰족한 촉이 있어 남을 찌를 때마다 그녀 자신을 함께 찔러 댔다. 그녀는 자신이 아픈 게 그 때문인 줄 까맣게 몰랐다.



40은 좀 달랐다. 40이라는 숫자가 그녀에게 남다르게 느껴졌다. 그녀는 마흔이라는 나이에 대해 줄곧 생각해왔다. 그녀는 마흔이면 어른, 이라고 생각했다. 어른이란, 제법 성숙하고, 지혜로운 존재였다. 마흔의 자신은 어른이 돼있을 거라 막연히 상상해왔다. 마음의 품이 넓고 차분하게 일에 대처하는 우아한 여성. 마흔 되면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신나면 아이처럼 콩콩 뛰기도 하고, 주로 칭얼거리고, 행동하지 않은 채 누군가 자신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자신을 충분히 돌보지 못했던 부모를, 자신은 충분히 돌봐야 한다는 무거운 의무에 짓눌렸다. 부모가, 사람들이, 세상이 변하길 바랐다. 그들을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 안간 힘을 썼다. 하지만 막상 그녀에겐 그녀 자신을 바꿀 힘은 없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살아온 것처럼 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녀 자신도, 세상 그 어떤 누구도 자신 뜻대로 바뀌지 않았다. 무력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완벽하게 아이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 자신을 봤다. 놀라웠다. 자신이 얼마나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기대하고, 대처하고 있는지. 알면 알수록 혼자 속으로 ‘헉’하고는 놀랐다. 그녀는 스스로 선택하려 하지 않았다. 책임지지 않기 위해. 책임지기에 자신은 한없이 약한 것만 같았다. 그녀는 기꺼이 행동하지 않았다. 기적같은 일들이 일어나길 믿었다. 감정에 따라 하루하루를 살았다. 기분이 좋은 날과 기분이 좋지 않은 날들이 번갈아 찾아왔다.


최근에 그녀는 이 모든 것들, 그녀가 살아왔던 방식들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선택들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선택은 내면의 소리를 따라 얼마든지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자신 인생의 선택을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도.

그녀는 이제 선택에 기꺼이 책임지고, 기꺼이 행동할 것이다. 성격이 혹은 감정이, 혹은 늘 생각해오던 자신의 이미지가 자신이라는 믿음을 의심하지 않으면, 그것에서 벗어날 기회가 없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이 자유롭고 무한한 존재라는 걸 느낀다.


자신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던 사실들이 강 위로 떠올라 수면 위에 떠있는 얼음조각처럼, 그 패턴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흘러가는 강 위로 드러난 한 부분인, 얼음에서 시야를 넓혀갈 수 있다면, 얼음을 떠받치고 있는 강, 강을 구성하는 물의 존재를 느끼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