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이라는 막연함
명상을 진지하게 접해본 건 요가를 배우면서였다. 수업 시작 전과 끝에 숨을 크게 들이쉬고 뱉는 과정을 의식적으로 지켜보는 경험을 처음하고는 아, 내가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사는구나! 처음 알아챘다.
그러고보니 생활하며 순간순간 숨을 멈추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긴장하면 숨을 쉬지 않길래, 그럴때마다 일부러 크게 쉼호흡을 했다. 그게 도움이 되는 걸 막연하게나마 느꼈던 것 같다.
명상을 배울 수 있는 것이구나,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건 순전히 그녀 때문이었다. 즐겨듣던 팟캐스트의 게스트로 동양철학과 심리 관련 컨텐츠에 대해 들려주던 그녀는 명상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센터를 오픈했다. 회사를 다니며 힘겹게 하루 하루 감정을 소비하며 지내던 나는 명상을 배우러, 그녀를 만나보러 그곳에 꼭 가보겠다 다짐했다.
하지만 그런 다짐은 이런 저런 이유에서 미루고 미뤄지기 일수였다. 완벽한 최상의 조건에서 그곳을, 그녀를, 명상이라는 것을 온전히 누릴 날을 기다렸다. 이런 인내심(사실 스스로 합리화하며 미루기) 하나는 자신있던 나는 정말 일년이 지나도록 명상을 시작하지 못했다.
결심을 하고도 몇 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그곳에 가봐야겠군, 하면서 퇴사를 했다. 사실 퇴사 후에도 한 동안 선뜻 그곳을 찾아가질 못했다. 매달 마감을 두고 살아온 나는 그런 마감있는 삶이 지긋하단 생각에 퇴사를 했지만, 마감이 있지 않고는 뭔가를 시작하거나, 혹은 뭔가를 끝내지 못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다.
그토록 다니고 싶은 명상 센타에 드디어 발을 디딘 것은 내가 원하던 그런 모든 완벽한 조건이 다 갖춰졌을 때는 아니었다. 남편과 함께 발리로 떠나는 티켓을 마련했고, 두 달여간 그곳에 머물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발리에서 남편은 서핑을 하고, 나는 명상과 요가를 할 참이었는데, 영어도 서툰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이국에서 명상 수업을 듣는 것이 불안하고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나는 두달 과정의 수업을 다 듣고 갈수 있는 일정이 아니었지만, 센타에 묻고 물어, 출발 전까지만 수업을 듣고 이후에는 발리 일정 후 들어도 된다는 배려를 받았다. 이런 상황이 되기 전에 뭐든 미리 처리해내지 못하는 나를 조금은 자책하며, 첫 수업을 기다렸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수업이었는데, 수업 전날 나는 별 생각없이 술자리에 갔다가 몇 년만에 심하게 과음을 했다. 어찌나 마셨는지 그 다음날 아침, 나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약까지 챙겨먹고는 컨디션을 되돌리기 위해 안간 힘을 썼지만, 평소 숙취에는 시간이 약이라는 나의 개인적인 지론에 따라 몸 상태는 여간 느릿 느릿 되돌아 오는 게 아니었다. 그 와중에 더욱 아픈 머리를 심란하게 하는 건 첫날 수업을 망쳐버리게 됐다는 자책 때문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하루 수업료는 얼마인거지, 나는 얼마를 날리게 되는거지?
내가 첫 수업을 간신히 갈 수 있었던 것 그동안 인생에서 몇 번 낼 수 있을까 말까, 한 정도의 의지였다. 수업료가 아까웠기 때문이었다면, 아마 당장에 합리화를 시키며 그날 하루를 이불 속에 보냈을 거다.
와인 한병에 흠뻑 절여진 나를 움직인 건 다시 들을 수 없는 수업 내용이 너무 궁금했다. 자는 한이 있더라도 들으면서 자야겠구나 싶어, 몽롱한 몸을 이동시킨 나는 강의실 좌식 의자에 몸을 뉘였다.
3시간 진행되는 수업의 반은 이론 수업이었고, 이후 반은 실제 명상을 해보고 궁금한 사항을 물어볼 수 있는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명상을 하는 방법이나 명상을 하면 좋은 것들에 대한 내용으로 수업이 진행됐고, 2부에서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동양철학에서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주역>을 토태로 이론 수업이 이어졌다.
이론 수업은 엄청나게 폭발적으로 감정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었다. 차차 명상과 이런 이론들을 통해 개인적으로 도움이 된 내용들로 글을 써나가볼까 한다.
5회차까지 수업을 듣고 발리 온 나는 이 수업을 듣기 전의 나와 듣고 난 후의 나로 나뉘어졌다. 그렇다고 물리적으로 삶의 방식이 확 바뀌었다거나, 획기적으로 문제들이 해결된 건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에 눈을 떴는데, 정말 놀랍도록 단순하면서도, 그대로 인생을 살아갔다면 전혀 혼자 깨닫지 못했을 것만 같은 사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인생이 정체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왔다. 변하는 것도 없고 나이가 들어가도 크게 삶에 지혜가 넓어지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막막했다.
물론 20대에서 30대 중반으로 들어서며 같은 직업을 10여 년이 훌쩍 넘게 해온 나는 십년 차를 막 넘기며, 아 이게 노련함이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이후 일을 처리하며 고민하던 많은 것들이 한층 수월해지고 한 권의 잡지를 만드는 과정을 저 높은 곳에서 바라보듯 넓은 시각으로 보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일을 처리하는 스킬에서는 확실히 높은 연차가 도움을 줬다. 초년생에 어떤 일이든 새로 받아들면 긴장하고 가장 좋은 처리법이 뭘까, 고민하느라 동동댔다면 이젠 회사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건 감정적인 인간관계의 문제였다.
몇 번의 수업과 감정 명상을 통해 나는 막연히 나를 힘들게 하고, 한없이 무기력했던,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됐다. 사실 명상을 통해 그걸 알게 된 순간은 하얀 전등이 켜지는 것처럼 밝고 명확했다. 단순히 추측한 거라거나, 어디서 주워들은 말로 나를 합리화하는 건 아닐까,하는 의심이라곤 전혀 들지 않는, 그런 느낌이다. 엄청난 섬광이 번쩍하는 깨달음은 아니었지만, 어두움 속에서 불이 문득 까꿍하고 켜지는 것처럼, 아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하는느낌이라면 알 수 있을지.
아는 순간 모든 것이 말끔하게 해결된 것은 역시 이번에도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가벼워진다. 살아가는 게 한결 나아지는 걸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그 과정이 반복되면, (물론 그 사이 예전과 같은 감정기복과 우울, 무기력을 겪는 날들도 스쳐지나가지만) 차츰 차츰 더 나아지겠지.
명상을 시작하기 전의 나와 지금 발리 사누르 해변에 한가로이 앉아 열정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는 나 사이에는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 그건 물론 모두 명상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거다. 나에게 폭발적인 환경변화가 따랐고, 지금은 더할나위없이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으니. 하지만 명상을 하지 않고 이곳에 왔으면 난 어땠을까?
발리에 와서는 매일 아침 호흡 명상을 연습하기로 했다. 나의 명상 스승이 된 그녀가 유투브로 두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아침 6시마다 온라인으로 만나 호흡 명상을 하는 거다. 확실히 혼자 나아가는 것보다 힘이 된다. 여기로는 오전 5시, 때문에 실시간도 아니고 매일도 아니지만, 나는 여전히 명상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