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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구의식 Jan 11. 2022

선생님께.


몇 번이나 선생님을 부르며 시작했던 편지를 채 한 통도 더 쓰지 못했습니다.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 것인지,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을 우물쭈물 대다가 무엇도 쓰지 못한 채 노트북을 덮어 버린 날이 며칠이 됐습니다. 손가락만이 아니었습니다. 

땅 위에서도 저는 우물쭈물 갈 곳을 잃은 사람 같았습니다. 

다시 약한 무기력증이 오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게 보내는 시간이 늘었습니다. 

전에 없이 초조하기까지 했습니다.  

별다른 의지 없이 살던 예전처럼, 저 끝에 다다르고 싶은 목표가 무엇인지 모르겠더란 말입니다. 갈 곳을 잃으니 어느 방향으로 들어서야 할지, 저는 초조해졌습니다. 예전과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인데, 예전의 나로 돌아갈까, 두려운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는 걸까요? 




저는 참 저를 모르더란 말입니다. 자신에게 몰두하는 일을 그토록 즐기는 자가 자신에 대해 이토록 모를 수 있다는 것도 참 감탄할 일입니다만, 전 제가 무얼 좋아하고, 무얼 하고 싶은 것인지, 그래서 어떻게 살고 싶은 것인지, 그 고민을 오늘도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천히 찾아가기에는 그리 적은 나이가 아닌지라 저는 초조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전, 덧없이 보내던 시간 중 하나의 질문을 건져 올립니다. 나를 지탱하는 나의 모습은 무엇일까? 

한 인간은 살면서 여러 가지의 타이틀을 수집합니다. 

나면서부터 가지게 된, 기본 장착된 타이틀이 있더란 말입니다. 제 경우,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동생으로 태어납니다,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타이틀도 있죠. 국민학생, 누군가의 친구, 누군가의 선배 같은 것이 그것일까요, 대학생이라는 타이틀부터는 직접 수집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직장인, 전문직, 남편의 아내, 프리랜서, 자영업자와 같은 타이틀을 채집함에 넣어 차례로 핀을 꽂아 두었습니다. 


그 질문의 핵심은 말입니다, 내가 어떤 모습, 어떤 행위를 할 때에, 어떻게 살아가는 것처럼 '남에게 보였을 때'에 안심이 되고 만족스러우냐는 것입니다. 어라,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답하더군요,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아버지로서 의무를 다할 때에 가장 나답게 느낀다. 그 앞에 앉아 있던 이는 자신의 직업으로써, 아나운서로 남 앞에 설 때,라고 말하더군요. 다른 이는 엄마에게, 잘했다는 말을 들을 때에, 만족스럽다고 하더군요. 


획득한 여러 타이틀 중 자신을 지지하는 가장 굵직하고 튼튼한 버팀목이 있다는 말이더군요. 다시 말해 그 버팀목이 무너졌을 때, 자신을 지지하는 가장 큰 축이 위협당할 때에, 그 사람은 가장 겁에 질린 상태가 된다는 말입니다. 선생님, 저는 저를 지탱하는 모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막연하나마, 창작, 이었습니다. (그리고 고결함, 마지막으로는 자유입니다)


저는 무언가 창작을 하는 나.로 비춰 지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제야 마음에서 무언가 팽팽했던 실이 탁, 끊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군요. 전 세상에 없던 것, 세상에 하나의 작은 변형을 일어낼 것, 손바닥으로 쓰다듬은 모래사장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만큼의 진동, 파문, 패임,이라도 일으킬 창작이 필요했던 거였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전 하루에도 셀 수 없이 여러 번 질투심이 일어나지만, 무언가 창작하는 아티스트를 향해서만은 불에 타는 듯한 강렬한 질투심과 경외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무얼 만들어 내야 할까요? 


전 원대하게 꿈꿔보며 좌절해봤습니다. 가장 가능성이 적은 음악 분야를 제일 먼저 제외시켰습니다만, 멋진 음악가로 살아가는 것은 어떨까, 저런 소리를 내며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은, 저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곡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하고 잠시 상상해봤습니다. 영화 제작도 제외하고 싶습니다만, 드라마 작가는 해보고 싶더란 말입니다. 그리는 일에 무한한 감동을 느껴본 바 있는 저이지만, 무얼 그려야 할지, 어떻게 그려야 할지, 그린 것으로 나는 먹고살 수 있게 될지, 그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무얼 그리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더란 말입니다. 역시 글을 쓰는 것이 좋을까요, 하지만 저에겐 지나치게 가혹한 초자아가 있습니다. 전 글을 쓸 수 있지만, 그것으로 무언가를 만들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그 막막함에 눈물이 다 쏟아질 것 같습니다. 


전 대신 당장 맛있는 커피 한 잔은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 역시 세상에 없던 것, 세상에 하나의 작은 변형을 일어낼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신 전, 당장 밤늦게 온 술 취한 친구의 메시지에 긴 답장을 쓸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 역시 세상에 없던 것, 세상에 하나의 작은 변형을 일어낼 것,은 아닐까요. 

전 대신 제가 조합한 글자들을 넣은 페이지가 두 쪽뿐인 노트를 만들어 볼까, 합니다.  

그것 역시 세상에 없던 것, 세상에 하나의 작은 변형을 일어낼 것,일 겁니다. 작은 변형, 손바닥으로 쓰다듬은 모래사장 위 떨어진 작은 돌멩이만큼의 파임, 진동, 파문, 그런 것들 말입니다. 


선생님, 제 창작물을 엄격한 기준의 잣대로 논하는, 

그래서 거의 매번 나무라기만 하는, 

제 초자아에게 어떤 말을 건네면 좋을까요, 그 아이의 마음을 잘 다독여 꼭 근사한 음악만이, 경이로운 글만이, 예술적인 영화만이, 창작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친구가 보고 싶은 밤, 선생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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