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내가 붙들고 있던 기준을 의심하다

2. 권한 없는 책임이라는 구조

by 숲의 선장

가만히 지켜보다 보니 나는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잘해왔다. 잘해 왔다는 것은 내가 정해놓은 기준에서 목표를 달성해 왔다는 뜻이다.

늘 해오던 일의 고도화라는 측면에서 나 스스로는 회사에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인정하고 있었고 나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년 나의 목표는 '조금 더, 조금 더'를 해왔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는 '조금 더'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조금 더 해봤자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다.

심지어 업무의 종류가 바뀌면서 나는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도 추가되었다.

최고에서 최고가 아닌 상황이 되었다.


욕심을 부렸던 이유는 또 있다.

어릴 적부터 조직이 바뀔 때마다 나는 리더역할을 해왔다. 그러다 보니 리더의 자리가 없더라도 자연스럽게 리더의 관점에서 그 상황을 보고 예측하고 준비하는 성향은 있었다.

조직 내 막내일 때조차도 그렇게 생각하고 기다려왔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을지, 더 나아질지, 최고가 될지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차석이 되었다. 성향도 다른 팀장님과 함께 업무를 하는데 조직에서도 뭔가 새로운 걸 원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을 내놓았다. 이렇게 하면 되고 저렇게도 해야 하고. 이상적인 팀의 모습에 대한 기준은 벌써부터 만들어져 있는데 사실 전제조건부터가 성립이 안 되는 상황이다. 모두의 관계가 좋을 때, 모두가 업무에 능숙하다는것을 전제로 생각한 나의 이상향은 이룰 수 없었고 나는 내 기준치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리고 환경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대표님께 받은 매우 큰 과제가 있었다. 가벼운 표현으로 팀에서 분석해 보고 보고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런데 팀장님은 이 업무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과제를 받을 때 약 3개월 정도 넉넉한 시간을 받았지만 3개월이 되도록 과제는 시작하지 않았다. 팀장님이 직접 발표해야 하는데 왜 안 하지?


나는 초조해졌다. 내 기준으로 봤을 때는 이미 치열하게 고민하고 방향을 설정하고 다듬어가야 하는 상황인데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구한테 뭘 해봐라도 없었다. 그냥 방치되고 있었다.

간혹 "하긴 해야 하는데.."하고 툭 던지기는 했지만 시작하지 않았다.

'안 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왠지 그냥 놔뒀다가는 내숙제로 돌아올 것 같은 불안감이 가득해졌다.

후배 팀원들 몇 명과 함께 서치를 하고 방향을 설정해 봤다. 리더의 방향과 의중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조사의 방향만 이것저것 하고 있었다.


놀라운 건 팀장님의 태도였다. 발표할 때가 다 되어가니 어디까지 했는지 점검하겠다는 거다.

'점검? 시작을 한 적이 없는데 점검을 하겠다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미팅에서 우리는 신나게 잔소리를 들었다.

"이대로 가면 깨질게 분명하다, 논리가 맞지 않는다. 근거가 부족하다. 다른 부서에서 유사하게 한걸 봐라. 우리가 훨씬 완성도가 낮다. 표현도 맞는지 모르겠다." 등등.

아 이건 뭔가.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래도 차석이니 팀원들에게 채찍질을 하기 시작했다.

"내일 오후까지 각자 이 부분 정리해서 보시죠"

무리해서 모든 일을 미뤄두고 이것부터 하라고 지시했다.

"시간이 없으니 일요일 아침까지 각자 작업해서 저한테 메일 보내세요"

"다음 주는 월요일에 밤 10시까지 야근할 겁니다. 미리 참고하세요"

"OO는 어디 간 거죠? 이 상황에서 다른 걸 한다고? 하.."


나는 6개월 만에 이미 팀 내에 제일 꼴 보기 싫은 몹쓸 선배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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