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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삶을 위한 한시 읽기

40일

by 은은


鍾鼎豈必貴(종정기필귀) 관직이 높으면 고귀한 걸까

簞瓢豈必貧(단표기필빈) 거친 음식 먹으면 가난한 걸까

貧者身自逸(빈자신자일) 가난한 사람은 몸이 편하고

貴者心長勤(귀자심장근) 고귀한 사람은 맘 수고롭네

從知五侯鯖(종지오후청) 이리저리 아부해 좋은 음식 얻어낸들

不及負暄人(불급부훤인) 따뜻한 햇볕 쬐는 행복만 못한 법이네

- 신흠(申欽, 1566~1628), <회고전사(懷古田舍)> 중 제2수


보랏빛 노을이 여러 상념에 젖게 만듭니다. 가을은 동식물들도 겨울 준비를 하게 하지만 인간에게도 한 해의 마무리를 잘 할 수 있게 자연을 통해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주는 것 같습니다.


어제는 아이들과 마산 315 아트센터에 헬가 전시를 보고 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빵, 아이스크림, 양배추, 호두, 앵두, 티백, 손가락, 포도송이를 이용해 강아지, 비키니를 입은 여성, 고양이, 여우, 사자 등의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별 볼 일 없을수록 흥미롭다’는 문구가 말주변이 없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저에게 위로와 위안이 되어 많이 와닿았습니다.


종정(鍾鼎)은 국가 의식에 쓰이는 종과 발이 셋 달리고 귀가 둘 달린 향로같은 제기를 말합니다. 둘 다 국가의 제사와 행사에 쓰인 도구이며 여기에 참석하려면 국가에서 높은 직책을 맡아야 하지요. 나랏일을 하며 귀한 음식을 먹어야만 자신이 높아지고 귀하게 되는 걸까요?


소박하나마 손수 텃밭을 가꾸어 그 자리에서 난 상추, 고추, 오이, 감자, 고구마를 수확하여 가족과 이웃, 친구들과 손수 나물에 비벼 먹거나 감자, 고구마를 삶아 먹는 즐거움이 더 클까요?


지위가 높을수록 책임과 역할, 삶에 대한 압력도 커지게 되겠지요. 경제적 부와 높은 지위를 추구할수록 우리네 삶은 점점 급해지고 자신과 주위 사람들, 자연, 작은 생명들, 나무, 바위, 숲, 새소리, 계곡 소리를 접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겠지요.


어떤 삶을 택하든 여러분의 자유이지만 자연을 마주한 소박한 밥상, 생명에 대한 감사야말로 내 몸과 마음을 제대로 대우해주는 일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 선조들은 청빈(淸貧:맑음과 가난함)과 겸손을 최고 가치로 여기며 일상을 살아가는 가운데서도 마음의 맑음과 가난함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한 나라의 국정을 짊어지고 가는 임금 또한 흉년이나 전염병이 돌면 세금을 줄여주거나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는 등 백성들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조화로운 삶》이라는 자서전적 에세이로 유명한 미국의 헬렌 니어링(1904~1995)과 스콧 니어링(1883~1983) 부부는 함께 먹고사는 데서 적어도 절반 이상은 자급자족한다는 점, 돈을 모으지 않다는 점, 동물을 키우지 않으며 고기를 먹지 않는 것, 지구 생명공동체와의 ‘조화로운 삶’의 원칙을 평생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며 귀농과 자급자족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역할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삶의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

마음의 평정을 잃지 말라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

집, 식사, 옷차림을 간소하게 하고 번잡스러움을 피하라

날마다 자연과 만나고 발밑의 땅을 느껴라

농장 일이나 산책, 힘든 일을 하면서 몸을 움직여라

근심 걱정을 떨치고 그날그날을 살아라

날마다 다른 사람과 무엇인가 나누라

혼자인 경우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무엇인가 주고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를 도와라

삶과 세계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라

할 수 있는 한 생활에서 유머를 찾으라

-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중에서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가난함과 고귀함은 물질과 돈의 많고 적음, 지위의 높고 낮음이 아닌 마음이 맑고 순수하며 여유와 겸손을 알며 자연과 이웃을 배려하고 절제하며 삼갈 줄 아는, 삶을 사랑하는 삶의 자세에 달려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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