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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삶을 위한 한시 읽기

42일

by 은은


稻苗之生(도묘지생) 벼싹이 나올 때면

嫩綠濃黃(눈록농황) 연한 녹색에 짙은 황색

如綺如錦(여기여금) 한 폭의 비단같이

翠蕤其光(취유기광) 푸른빛이 은은하여

愛之如嬰孩(애지여영해) 어린 자식 사랑하듯이

朝夕顧視(조석고시) 아침 저녁 보살피고

寶之如珠玉(보지여주옥) 주옥처럼 보물로 여겨

見焉則喜(견언즉희) 보기만 해도 기쁘다네


有女蓬髮(유여봉발) 쑥대머리한 여인이

箕踞田中(기거전중) 논 가운데 주저앉아

放聲號咷(방성호도) 방성통곡을 하면서

呼彼蒼穹(호피창궁) 하늘 향해 호소하네

忍而割恩(인이해은) 사랑의 정을 딱 끊고

拔此稻苗(발차도묘) 그 벼 싹 다 뽑다니

盛夏之月(성하지월) 오뉴월 한여름에

悲風蕭蕭(비풍소소) 찬바람이 쓸쓸하네


芃芃我苗(범범아묘) 우거진 우리 모를

予手拔之(여수발지) 내 손으로 다 뽑고

薿薿我苗(의의아묘) 무성한 우리 모를

予手殺之(여수살지) 내 손으로 죽이다니

芃芃我苗(범범아묘) 우거진 우리 모를

藨之如莠(표지여유) 가라지처럼 뽑아내고

薿薿我苗(의의아묘) 무성한 우리 모를

焚之如槱(분지여유) 화톳불 놓듯 태우다니


搴之束之(건지속지) 뽑아서 묶어서

寘彼溪窊(치피계와) 저 웅덩이에 두었다가

庶幾其雨(서기기우) 행여 비가 내리면

挿之汚邪(삽지오사) 낮은 땅에다 꽂아볼까

我有三子(아유삼자) 내 자식 셋이 있어

或乳或食(혹유혹식) 젖도 먹고 밥도 먹는데

願殪其一(에애기일) 그 중 하나를 죽여서라도

赦此稙穉(사차직치) 이 어린 모 살렸으면

- 정약용, 「拔苗(발묘)」


배롱나무의 다홍빛 꽃잎을 보며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도 각양각색의 꽃잎을 달고 있으면 아름답지 않을까 문득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다산 정약용의 ‘모내기를 뽑으며’란 제목의 시를 가지고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봄철이면 농부들이 모내기를 하느라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는 중노동을 하게 됩니다. 생명의 근원인 곡식을 생산하느라 하루 해가 짧다고 느껴질 정도로 이 일에 전념하게 됩니다.


우리는 농부들의 수고에 대해 곧잘 잊곤 합니다. 마트에서 사거나 인터넷으로 쌀을 주문만 하면 집 앞에 도착하는 세상에 살고 있고 농촌과 도시와의 물리적 거리가 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집에서 외식하면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쌀밥이 거저 주어지는 것일까요? 다산은 왜 시의 제목을 ‘발묘’라고 짓게 된 것일까요? 한 연 한 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는 총 4연 32구, 1연은 각 8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연은 벼싹이 나올 때의 색깔과 모습, 벼를 보살피는 기쁨에 대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벼를 자식에 비유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벼 싹이 나올 때의 녹색과 황색, 푸른 빛이 시인의 마음을 은은하고 잔잔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만큼 사랑스럽고 기쁘기만 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둘째 연은 쑥대 머리한 여인이 하늘 향해 통곡하며 벼 싹을 다 뽑아버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쑥은 봄철에 캐어 쑥떡이나 쑥국, 나물로 해먹는 우리 주위에 흔한 약초이자 제철 음식이기도 합니다. 쑥대머리는 잎이 사방으로 퍼져 있는 쑥처럼 머리카락이 정돈되지 않은 모습을 말합니다.


생명의 줄기인 모를 갑자기 뽑아버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이 여인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넋 놓고 하늘 향해 소리 내어 울고 있는 것일까요? 자식과 같은 벼 싹과 정을 딱 끊어버리니 무더운 한여름에도 찬바람이 느껴지고 마음은 텅 빈 듯 차갑기만 합니다.


셋째 연은 우거진 모를 자신의 손으로 뽑고 태워 생명을 앗아버린 슬픔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도 안 되고 일어나서도 안 될 일이지만 생활고나 말 못할 사정으로 인해 가족이 함께 죽거나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일 때의 어미의 마음은 어떨까요? 여러분은 그 상황과 심정이 이해가 되는지요?


넷째 연은 뽑아놓고 미처 태워버리지 못한 벼를 묶어 웅덩이나 낮은 땅에 꽂고 비가 내리길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자식 셋은 젖도 잘 먹고 밥도 잘 먹는데 제2의 자식인 우리 모만 비가 오지 않아 굶고 있다고 슬퍼하고 걱정합니다. 마지막 두 구는 극단적인 말까지 서슴치 않습니다. 세 아이 중 하나를 희생해서라도 어린 모를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생명의 근원인 ‘모’가 중요한가요? 아니면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중요한 것일까요? 가뭄으로 고통받는 벼의 마음을 이 시만큼 잘 대변하는 글도 없다고 여겨집니다.




벼 혹은 곡식은 만물을 먹여 살리는 근원입니다. 보다 큰 생명을 살리기 위한 어머니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는 이 시를 통해 수확 철에 채소류며, 과일, 곡식이 많이 생산되어 가격이 떨어지게 되면 팔지 못하고 묻거나 태워버리는 농심(農心)과 어심(漁心: 어부의 마음)을 한 번 헤아려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인간의 욕심이 불러들인 기후 위기와 환경오염으로 인해 강이나 바다에서 죽어 떠오르는 이 땅의 생명들의 희생 또한 함께 생각해보는 것이 문명의 전환의 시기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이 땅의 생명 가진 것,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한 돌봄, 나눔, 절제 등의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이러한 가치들을 실천으로 옮겨갈 때 먹거리, 만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자연과의 조화,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나의 일처럼 좀 더 절실하게 깊이 와닿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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