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삶을 위한 한시 읽기

51일

by 은은


暉暉朝日暖(휘휘조일난) 환한 아침 햇살이 따뜻하여

晴崖方煦嫗(청애방후구) 맑은 언덕이 그대로 할머니 품속 같네

羚羊巧曝背(영양교폭배) 영양이 교묘하게 등을 쬐는데

瞑目和噓煦(명목화허후) 눈 감고 내쉬는 숨이 퍽도 부드럽네_

怡暢四肢融(이창사지융) 기쁘고 상쾌하여 팔다리가 녹아날 듯

自欣得佳遇(자흔득가우) 좋은 때 만난 걸 스스로 기뻐하네

洞深崖又險(동심애우험) 골 깊은데 언덕마저 험하여서

妥帖不驚懼(타첩불경구) 마음에 흡족한 채 놀라움도 두려움도 없네

我愛得其所(아수득기소) 그런 곳 만난 걸 내가 사랑하여

徐徐撫其背(서서무기배) 슬슬 그 등을 어루만져 주었네

初若乍驚愕(초약사경악) 처음엔 잠시 동안 놀래는 것 같더니만

漸馴與我伍(점순여아오) 점점 길들여져 나와 벗이 되었네

嗅我舐我膚(취아지아부) 날 두고 냄새 맡고 살도 핥아 보더니

抵額喜相對(저액희상대) 이마를 들이대면 기뻐 서로 마주보네

汝亦羊外羊(여역양외양) 너 역시 양이 아닌 양이라지만

我亦人外人(아역인외인) 나 또한 사람 밖의 사람이라네

同是物外物(동시물외물) 다 같이 만물 밖의 만물이기에

各保身外身(각보신외신) 제각기 몸 밖의 몸 보호하려니

誰追汝歧路(수추여기로) 누가 너의 갈림길을 좇을 것이며

誰訪我灝濱(수방아호빈) 누가 날 찾으리, 아득히 먼 곳을!

汝角掛寒巖(여각괘한암) 네 뿔은 찬 바위에 걸어 놓고

我冠彈松風(아관탄송풍) 내 갓은 솔바람에 튕겨지누나

汝尾掉蒼苔(여미도창태) 네 꼬리는 푸른 이낄 흔들어대고

我足漱飛潨(아족수비총) 이내 발은 폭포수에 더러움 씻어내

熙熙同負喧(희희동부훤) 네 기쁘게 정답게 함께 햇살 쬐면서

共棲青山峯(공서청산봉) 청산 봉우리에 우리 같이 살자꾸나

-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영양(羚羊) 이 맑은 언덕을 달려 볕을 쬔다 [영양축청애이폭일(羚羊逐晴崖以曝日)]


어제는 비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교육원 아이들과 합천 해인사를 다녀왔습니다. 합천은 제가 나서 자란 곳인 대구와 가깝고 저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해인사에 인사드리기 위해서는 성보박물관에 주차해서 1킬로 가량을 계곡을 끼고 낮은 경사를 올라가야만 합니다. 천년 고찰의 웅장한 모습에 삿된 마음은 한 순간에 사라짐을 느꼈습니다. 비가 내리는 중이라 힘차고 쉼없이 흘러내리는 계곡과 시원스레 줄지어선 소나무와 바위의 무한 청정기운으로 인해 아이들과 함께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아울러 '늘 깨어있음'이란 화두를 정신 바짝차리고 붙들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위 노래는 한 구에 다섯 글자인 5언과 전체 길이가 26구로 이루어진 비교적 긴 호흡의 시입니다. 들짐승인 영양에 대한 김시습의 따스한 시선이 세밀하게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영양이 "눈 감고 내쉬는 숨"소리까지 포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골 깊고 언덕 험한 산수 속에서 홀로인 김시습과 영양이 서로 교감을 나누는 장면이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의 따뜻한 애정에 영양은 경계심을 풀고 둘은 서로 벗이 됩니다. 화자와 영양은 같은 처지입니다. 영양은 양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단독자로서의 양이며 화자 또한 인간 세상에서 벗어나 고독을 즐기는 나그네입니다. 아름다운 산수 속에서 사람에게 느낄 수 없었던 정을 영양과 나누면서 서로 소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스함은 인간을 비롯하여 만유를 포용하는 보편적인 정서적 가치입니다.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고 그 내민 손을 상대방이 잡아 줄 때 우주적, 인격적 교유가 시작 됩니다. 그것은 곧, 서로의 시간을 내어주는 진정 어린 시선의 마주침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이러한 정서적 가치를 김시습은 가슴 깊이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깨어있음을 통해 바다(온 누리)에 진리와 사랑, 조화와 균형, 자비와 연민, 배려와 친절의 도장[해인(海印)]을 찍어가는 나날들 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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