處士本閑雅(처사본한아) 이 사람은 본래 한적하고 아담하여
早歲好大道(조세호대도) 어릴 적부터 큰 도를 좋아했네
志與時事乖(지여시사괴) 뜻이 세상과 어긋나
紅塵跡如掃(홍진적여소) 속세 흔적 하나도 없지
少小遊名山(소소유명산) 젊어서는 명산에 노닐며
甿俗不交好(맹속불교호) 속된 바보들과 사귀지 않았네
晚居瀑布傍(만거폭포방) 늘그막에 폭포 곁에 살며
欲作淸溪老(욕작청계로) 맑은 시냇가의 늙은이로 살고자 했네
世人那得知(세인나득지) 세상 사람들 이를 모르고
尋常稱潦倒(심상칭료도) 형편없이 되었다고 구시렁대네
處士亦不猜(처사역불시) 이 사랑은 그런 말에 아랑곳 않고
每被風花惱(매피풍화뇌) 바람에 지는 꽃잎을 괴로워할 뿐
隱顯或無時(은현혹무시) 지금은 드러냄과 숨음을 무시로 하며
期往蓬萊島(기왕봉래도) *봉래도(이상향) 가기를 기약한다지
- 김시습(金時習,1435~1493), <스스로에게 남기는 글[自貽(자이)]>
*봉래도(蓬萊島): 중국 전설에서 나타나는 가상적 영산(靈山). 동쪽 바다의 가운데에 있으며, 신선이 살고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다고 한다.(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간밤에 누군가에게 칼에 찔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순간 흠칫하다가 꿈임을 알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요즘 심적으로 많이 불안정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깁니다. 아침에 깨어 오늘은 어떤 시를 소재로 글을 쓸까 하다 김시습의 ‘자화상’이 떠올랐습니다. 김시습은 저의 대학원 시절 동반자이자 연구 논문의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이분의 삶을 발끝이라도 따라가기는 어렵겠지만 그의 유불선을 아우르는 해박함과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움을 동경하였습니다. 물론 그에 따르는 생계의 고통은 감내해야 했겠지요.
잘 아시다시피 김시습은 어릴 때부터 시를 잘 지어 신동으로 소문이 났었습니다. 세종에게까지 알려져 시재(詩才: 시짓는 재주)를 테스트받고 세종이 감탄하여 비단 다섯 필을 상금으로 하사하며 장차 그를 크게 쓰겠다고 말합니다. 어린 김시습은 비단 한 필을 풀어 나머지 네 필을 묶어서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세조가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세조 밑에서 벼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팔도를 유람하며 남긴 시가 삼천여 수가 됩니다. 그의 작품세계는 모두 제도권 바깥에서 때로는 스님이 되었다가 때로는 처사로 생활하며 이뤄진 것들입니다. 자신의 지조를 지켜낸다는 건 경제적 궁핍을 수반한 많은 고통이 뒤따를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를 감내하고서라도 시인은 후세에 귀감이 되는 글보물을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늘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김시습의 자신에게 남기는 노래를 읽다가 문득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이 떠올라 인용해 봅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서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자화상(自畵像)>
그의 시에는 산모퉁이, 논가, 우물, 달, 구름, 하늘, 바람, 가을, 사나이, 추억이라는 시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모두 자연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미움, 연민, 그리움, 맑음, 밝음, 수줍음이라는 단어들에서는 그의 일생의 고민과 번뇌, 삶의 자세 그리고 성찰과 깨어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김시습이 ‘바람에 지는 꽃잎을 괴로워’하듯 윤동주 또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였습니다. 순수하고 맑은 영혼으로 연민과 자아 성찰을 하였기여 아름다운 시편들을 우리가 보고 듣고 암송하며 노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맑고 밝으며 따뜻한 시선과 시심(詩心)으로 속도와 실적 위주의 문명 사회로 인한 분열된 자아상을 ‘더 큰 우주 지성’으로의 통합된 자화상으로 그려나가는 매일 매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