發篋而(발협이) 상자를 열다가
得親之書(득친지서) 어머니의 편지를 얻어
見其述(견기술) 자식이 먼데 나가 노니는 데 대한 마음을
遠遊之情(원유지정) 풀어놓으시고
叙離別之苦(서리별지고) 헤어져 있는 괴로움을 말씀하신 대목을 보면
則未嘗不魂消骨冷(즉미상불혼소골랭) 넋이 녹고 뼈가 저미지 않을 수 없어
溘欲無知也(합욕무지야) 갑자기 차라리 몰랐으면 싶었네
屈指而筭(굴지이산) 손꼽아 가며
親之齡與己之生(친지령여기지생) 어머니 연세와 내 나이를 세어보니
而四十纔八(이사십재팔) 돌아가신 어머니 연세는 겨우 48세이시고
二十逾四(이십유사) 나는 24살이니,
則未嘗不悵然踟躕(즉미상불창연지주) 슬피 머뭇거리며
失聲長號(실성장호) 소리를 놓아 길게 부르짖으며
而淚之無從也(이루지무종야) 비 오듯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네
- 박제가(朴齊家, 1750-1805), <효도하지 못한 슬픔을 읊다[서풍수정기후(書風樹亭記後)]>
박제가는 여러 차례 청나라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다녀온 뒤에 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조선의 낙후된 제도와 생활을 개선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을 《북학의(北學議)》에 담아 임금께 진상한 실학파 지식인입니다. 박지원, 유득공, 이덕무, 이서구 등 당대에 내놓으라 하는 실학파 문인들과 교유하였으며 중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는 급진적인 주장을 펼치신 분이기도 합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그 또한 어머니의 생전 나이와 비슷한 연령대에 생을 마무리하여 더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위 글은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편지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자식은 나이가 많건 적건 어머님의 눈에는 늘 불안하고 위태해 보입니다. 남에게 해코지는 당하지 않았는지, 길을 가다 넘어지거나 차에 치이지는 않았는지, 직장에서 상사에게 심한 꾸지람을 받지는 않았는지 한결같이 노심초사하며 달빛 아래 정안수를 떠다 놓으시고 손에 지문이 사라지도록 자식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빌고 또 빕니다.
저희 할머니는 제가 3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저희 아버지 나이 서른 때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약주를 한 잔 거나하게 드실 때면 한결같이 ‘엄마 보고 싶다’라고 효도를 다하지 못한 사무친 그리움을 풀어놓습니다. 젊은 나이에 고생만 하시다 간 어머니를 생각하면 얼마나 그립고 마음이 아플까요?
저희 어머니는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셨습니다. 제가 군에 입대하자 보고 싶은 마음을 시어른께 들킬까 싶어 화장실 수도꼭지를 틀어 놓고 자주 우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박제가의 어머님 또한 이별에 대한 고통과 자식을 보고 싶은 마음을 글로 풀어내며 눈물을 떨구지 않았을까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위 편지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어머니 나이와 자신의 나이를 손꼽아보며 자신의 딱 곱절만큼만 사시다 간 어머님을 생각하니 가슴 속 뜨거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낍니다. 우리네 옛날 할머니, 어머님들은 무릎 한 번 펴지 못하고 삯바느질에 빨래에, 농삿일, 시부모를 모시고 자식을 먹이고 살리는 일을 하시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자식이 잘 된 모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박제가의 어머님 또한 얼마나 많은 한을 안고 가셨을까요?
그의 어머님께 바치는 글[전상서(前上書)]을 보며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자주 안부를 여쭙고 소소한 기쁨들을 자주 드리자 하는 실천하지 못한 약속을 또 하게 되는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