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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 May 30. 2024

생태적 삶을 위한 한시 읽기

112일


 神以默而定(신이묵이정정신은 침묵 통해 안정되고

 氣以默而積(기이묵이적기운은 침묵 통해 축적되며

 言以默而深(언이묵이심언어는 침묵 통해 깊어지고

 慮以默而得(려이묵이득생각은 침묵 통해 터득하네

 장유(張維, 1587-1638, <침묵을 성찰하다[默所銘(묵소명)]>      


  제가 몸담고 있는 교육공동체는 올해부터 4년간 행복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교사 자율 동아리인 ‘일상사 다반사(日常事 茶飯事)’를 동학년 선생님을 주축으로 조직하였습니다. 모임은 1, 2학기 중간·기말 시험 기간 4번, 중간, 기말고사 사이 기간 2번 해서 총 6번을 운영하는 것으로 계획하였습니다. 계획을 세우는 시기에 한창 아이들 생활지도로 바쁜 철이라 ‘과연 실행이 가능할까’ 의구심을 가졌는데 어제 모임을 가져보니 동 학년 선생님들의 지혜를 따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두레헌’혹은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곳[탁우재(琢愚齋)]’라는 찻집이었습니다. 지난번 밀양 답사를 이끌어 주었던 석파장인[石破匠人, 아이들의 돌을 깨어 주는 석공]께서 또 한 번 수고해 주셨습니다. 석파장인은 수학 교사이나 동서양의 고전을 두루 섭렵하고 침(鍼)·차(茶)·악(樂)에도 조예가 깊은 선인(仙人)입니다. 그가 우려낸 30년 숙성의 보이차와 황차 맛은 일품이었고 ‘두레헌’이란 공간이 주는 힘과 분위기, 품격의 매력에 빠져 우리가 두레헌인지 두레헌이 우리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경험할 수 있어 더없이 좋았습니다. 석파장인 외에 함께한 이로는 일전에 거제 환경답사를 추진하신 기후 천사님 두 분, 배꽃 선생님, 수학 수석 선생님입니다.     


 두레헌은 왼편으로 낙동강의 종착지인 부산 명지와 하단을, 오른편에는 안골포를 좌우 날개로 삼고 해발 479.2m의 보배산을 병풍으로 두르고 있는 고요함과 따스함을 겸비한 운치 있고 정감이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주인장 내외분은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로 특히 바깥어른께서는 한학, 전각과 서예, 정원 가꾸기에 일가견이 있는 재야의 고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곧 있으면 노인 인구가 천만이 됩니다. 길 가는 사람 다섯 명중 한 명이 노인입니다. 신체적 건강과 함께 마음의 뜰을 넓히는 활동들도 활발해지리라 전망됩니다. 평생교육의 일환으로서 다향(茶香), 묵향(墨香:전각, 서예, 시서화, 캘리그라피 등), 서권기(書卷氣: 서책의 맑은 향기)에 취해보는 것도 여생을 의미 있게 보내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탁우재의 맑은 뜨락에 심겨져 있는 분홍빛과 흰빛이 조화를 이룬 어성초, 아담한 다실(茶室) 통창 밖으로 은은하게 내비치는 동글동글한 머루 잎사귀, 손으로 만져보면 진득하게 사과 향이 묻어나오며 흰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은 단아한 한복을 입은 여인이 연상되는 애플민트, 실내에 전시된 전각, 서예 작품, 때마침 주인장의 지도 아래 펼쳐지는 붓글씨와 수묵화의 향연, 다실을 풍요롭게 만드는 잔잔한 배경음악, 동료 교사와 함께 한 정담(情談)은 다시 볼 수 없는 즐거움이자 행복이었습니다.      


 우리의 정신과 기운, 생각과 언어는 침묵이라는 텅 빈 충만(법정 스님)과 일상의 단순함, 단아함, 절제된 삶에서 길러짐을 두레헌의 정원과 다실을 보며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주 삼라만상의 크디큰 기교는 서툰 것처럼 보인다[대교약졸(大巧若拙)]는 말씀을 되새겨 보게 되는 뜻깊은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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