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爲鼠常留飯(위서상류반) 쥐를 위해 언제나 밥을 남겨놓고
憐蛾不點燈(련아부점등) 모기가 불쌍해 등에 불을 켜지 않노라
自從靑草出(자종청초출) 절로 푸른 풀이 돋아나니
便不下堦行(변불하계행) 계단을 함부로 딛지 않노라
-탄연(坦然, 1069~1158), <게송(偈頌)>
이 시는 고려 17대 인종(仁宗) 때의 승려이자 탄연체로 서예사에서도 크나큰 발자취를 남긴 탄연 스님의 게송(偈頌:불교에서 경전의 교리나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는 데 사용하는 시)입니다. 이렇듯 예술 활동이 곧 자기 수양 과정임을 우리는 탄연 스님의 행적과 그가 남긴 시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 제2대 동학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 “하늘로써 하늘을 먹는다[이천식천(以天食天)]”고 하였습니다. 하늘은 인간과 자연, 우주와 지구공동체에 속해 있는 모든 대상을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와 유전적 배열과 다른 동물과 식물을 먹어야지만 생존을 이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지 않은가요? 어떻게 우리와 유전적 특징이 다른 동식물을 먹고도 우리 몸과 마음에 아무런 탈이나 이상이 없는 걸까요?
유전적 원형의 근원을 따라가 보면 같은 원자나 분자, 동일한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라틴어로 인간을 ‘humus’라고 합니다. ‘흙’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흙으로 구성되어 있고 흙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사람 또한 자연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스님이 불필요한 옷이나 도구 등을 소유하지 않고 살아있는 생물을 함부로 죽이지 않으며 최소한의 음식을 섭취하고 채식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 이외의 생명을 위해 밥을 남겨두고 모기와 나방 등 불을 좋아하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불을 끄는 그 마음은 무엇일까요?
풀이 아플까 풀이 죽을까 걱정되어 살아있는 풀을 함부로 밟지 않는 그 마음은 무엇일까요? 우리 선현 중 퇴계 이황 또한 생명을 소중히 하라는 가르침이 있어 소개합니다.
勿履生草(물리생초) 살아 있는 풀을 밟지 말고
勿踏生蟲(물답생충) 살아 있는 벌레도 밟지 말라
勿折方長(물절방장) 바야흐로 자라거나
勿除方茁(물제방촬) 움돋는 것을 뜯지 말라
物亦好生(물역호생) 사물 또한 살기를 좋아함에
君子敷化(군자부화) 군자는 베풀어 살려야 하느니
- 이황, <풀을 꺾거나 제거함을 경계하다[계절제(戒折除)]>
이황 또한 “살아 있는 풀을 밝지 말고/살아 있는 벌레도 밟지 말라”고 말합니다. 풀벌레는 사람과 같이 지구 생태계에서 나름의 역할이 있기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주적 입장과 생명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과 풀, 벌레가 과연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 같이 소중한 생명인 걸까요? 우리에게 지구상의 생명을 함부로 대하고 다룰 권한이 과연 있는 것일까요? 그 해답은 시의 마지막 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는 “사물 또한 살기를 좋아함에/군자는 베풀어 살려야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힘이 세고 권력이 있다고 해서 나보다 약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과 생명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덕과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선현들은 ‘생명 사랑’을 바탕에 두고서 서로가 서로를 살려 주는 ‘생명 네트워크’에 대해 체득하며 삶을 대하고 존중해왔음을 이 시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