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는 ‘움직임과 발견’의 기미를 따라 흘러 다니는 사람이다. 몸에 지니는 것은 가볍고 표정은 바람결 같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헤어짐에 익숙한 몸짓은 가볍고 고요하다. 그는 늘 자신과 주변에 대해 깨어있다. 하나라도 더 많이 발견하고, 하나라도 더 많이 사랑하려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을 터이다. 만약 사물에게 눈이라는 인식 작용이 있어 여행자를 바라본다면 그는 곧 흔적 없이 사라질 존재이다.
유럽의 어느 고택, 랍비의 집에 한 여행자가 초대받았다. 랍비가 사는 집은 넓은 마당에 반질거리는 넓적 돌다리가 깔려 있다. 마당 한편에 작은 도랑이 있는 것인지,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도 재잘재잘 들려왔다. 여행자는 고색창연한 대문과 담장을 지나 장미의 정원을 돌아 긴 회랑을 거쳐 랍비의 방에 당도했다. 랍비의 방에 들어선 여행자는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여행자가 말했다.
“여기에서 주무시고 일어나십니까?”
“그렇소만.”
“바깥은 저렇게 화려한데 막상 방에는 아무것도 없군요.”
“그러면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은 어디 있소?”
“저야. 여행 자니까 배낭 하나면 충분하지요.”
“나 또한 마찬가지오. 나도 잠시 이 세상에 여행온 사람인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소.”
“그래도 저 넓은 마당과 화려한 정원을 소유하고 있잖습니까.”
랍비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건 우리 선배 여행자들이 가꾼 것들이오. 나도 가끔 손질하긴 하죠. 머지않아 후배 여행자가 가꾸고 있겠지요.” (잭 콘필드, 《마음이 숲을 거닐다》에서 참고)
여행자가 견뎌야 할 숙명적 원칙,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반드시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 방황이거나 실종이다. 여행자의 최종 종착지는 늘 시작점이다. 그런 점에서 여행자는 어쩌면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고향을 등지고 걷는 사람이다. 당신의 삶과 죽음의 궤적을 닮지 않았는가. 여행자의 두 번째 숙명은 ‘낯섦’이다. 늘 새로운 풍경이나 풍습을 욕망함으로써 낯선 시공과 사람 속으로 스며든다. 여행자에게 익숙함이란 일종의 경고 카드다.
겉보기에는 여행자지만 노동자인 사람이 있다. 일과 돈이 무의식적 목적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여행하지 못한다. 설사 호화 크루즈를 타고 대서양 횡단을 하고 있더라도 그는 노동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만약 랍비의 집에 노동자가 초대받았다면 그는 랍비의 아름다운 정원과 긴 회랑, 텅 빈 방안에서도 마음속으로 공사거리와 그 가격을 매기고 있을지 모른다. 정원을 이렇게 고치면 얼마가 되고, 회랑 벽면에 뚫린 바람구멍을 막으면 수입이 얼마….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는 돈 생각을 하면서 손마디를 뚝뚝 꺾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하면서도 노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 노동을 하면서도 여행 중인 사람도 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어느 한 사람은 여행자처럼 눈을 반짝이지만 다른 사람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문다. 노동자는 계산하고 여행자는 즐긴다. 노동자는 힘을 주고 여행자는 이완한다. 노동자는 두리번거리지만 여행자는 순간순간 집중한다. 노동자는 뭔가에 묶여 있지만 여행자는 자유롭다. 노동자는 무겁고 단단하지만 여행자는 가볍고 부드럽다. 노동자는 안에서 몸부림치고 여행자는 빠져나와서 춤을 춘다.
당신은 노동자인가 여행자인가. 어쩌면 당신은 이미 질문했을 것이다. 오늘 하루 나는 여행했을까 노동했을까. 가만히 돌아보면 여행했던 순간도 있고 노동했던 순간도 있을 터이다. 이를테면, 일 년 수입 3천만 원 미만의 사업장을 선정하여 재난지원금 지급 기안문을 오늘 퇴근 시간 전까지 작성해야 할 때, 당신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정상적인 사업장을 갖춘 사람인지 아닌지 따져보고, 수입에 따른 온갖 과세 자료도 뽑아보는 동안 여행자처럼 가볍고 편안하고 춤추듯 리드미컬하기는 어려울 터이다. 오히려 당신은 눈에 힘을 주고 신경을 곤두세워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상태를 겪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당신은 줄곧 강도 높은 노동에 갇혀 있지는 않았다. 기안문을 모두 마친 순간 문득 여행자의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다. 드디어 일에서 빠져나와 갓 탈피한 나비처럼 날아오르는 기분을 만끽한다. 노동자에서 여행자로 전환된 순간이다. 문제는 ‘자각(알아차림)’이다. 당신의 내면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이 기적의 순간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것이다.
세상에는 자신이 지금 노동자 모드인지 여행자 모드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일을 하거나 걷거나 대화를 하는 동안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나 마음의 현상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차로 비유하면 제동 장치가 고장 난 것처럼 맹목적인 주행 상황이다. 그는 잔뜩 긴장한 근육으로 내달리거나 게으르고 나른하게 풀려 있거나, 둘 중 하나지만, 둘 중 하나의 상태에 갇혀 있음을 알지 못한다.
명상은 물론 여행자 의식을 닮았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의 긴장과 폭주에서 빠져나와 나비처럼 날갯짓하며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일이다. 손가락 끝으로 이 원고를 타이핑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행자 같은 호기심으로 집중하면서 미소를 띠고 ‘자판을 두들기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런데 이 ‘바라보기’가 잘 안 되는 이유는 뭘까.
“저야. 여행 자니까 배낭 하나면 충분하지요.”
“나 또한 마찬가지오. 나도 잠시 이 세상에 여행 온 사람인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소.”
당신의 노동을 여행으로 바꾸는 데는 이 마음 하나로 충분하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