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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돌 Jan 06. 2023

은퇴한 곽부장님들이 몰려온다

돈과 시간이 남아돌 때 당신은 무엇을 할까

작년에 은퇴한 곽부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인사도 없이 대뜸 나오는 말이 “내가 회사에 뭐 좀 도와줄 일 없어?”다. “아, 선배님, 별고 없으시죠?” “응, 나야 뭐, 너무 건강해서 탈이지요.” 곽 부장은 맹 팀장한테 높임말과 내림말을 섞어서 쓴다. 맹 팀장은 곽 부장의 떡 벌어진 어깨를 떠올린다. 은퇴하기 3년 전에 사놓은 강남 아파트 갭 투자 덕분에 지금은 30억대 아파트를 두 채나 보유하고 있다는 그를 질투 섞인 부러움으로 바라봤던 기억이 새롭다. ‘그 아파트 잘 계시죠?’ 하마터면 그렇게 안부를 물을 뻔했다.      


맹 팀장은 모바일 폰을 왼쪽 어깨와 귀 사이에 끼워 넣는다.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고, 두 손으로 ‘악플 고객 대응(안)’이라는 제목이 적힌 서류 뭉치를 들어 책상에 탁탁 치면서, 시계를 힐끗 바라본다. ‘제기랄, 6분 남았네. 바빠 죽겠는데 하필...’ 그런데도 곽 부장은 모바일 폰 속에서 기어이 한마디 보탠다. “두어 달 후에 소비자 권익 위원회 사외 위원들 교체한다는 말이 있던데, 그거 좀 부탁하면 안 될까?” “아, 예, 선배님, 사외 이사하시게요? 제, 제가 지금 바쁘니까 그즈음에 전화 한 통 주시면...” 일단 뒤로 미루고 전화를 끊는 것이 급하다. 다다다다. 회의실로 잰걸음을 하면서 맹 팀장은 생각한다. ‘아니, 저 양반은 돈이 없는 거야, 할 일이 없는 거야!’     


돈과 시간이 남아돌 때 사람은 무엇을 할까. 한국에서 재산 보유고가 가장 높은 계층이 지금 은퇴를 준비하거나 은퇴한 베이비 붐 세대다. 이들은 본의 아니게 한국 사회의 경제적⋅물질적 시공간을 돌발적으로 확장시킨 풍운아다. 이들은 교육열 1세대이기도 하다. 어지간하면 고교 교육 정도는 이수했고, 어지간하면 취직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의 은퇴 품목에 ‘텅 빈 시공간’이 들어가 있다. 

    

은퇴한 곽 부장님 들이 몰려온다. 그들은 여전히 체력이면 체력, 지력이면 지력이 젊은이 못지않다는 믿음이 있고, 곰삭은 인생의 깊은 맛을 이제야 실감한다. 어느 자리에서든 입은 다물고 지갑을 열기만 하면 존중과 존경 딱지를 이마에 붙이는 데 어렵지 않을 줄 알지만, 후회하고 말지언정 침묵할 수 없다. 어쩌다 반창회에서 족구 시합에 들어갔다가 공 따로 발 따로 팔 따로 노는 현상에 남몰래 경악하기도 한다.    

   

살아보진 않았지만, 100세 시대다. 경험치로 볼 때 어디선가 이런 이구동성이 합송 되면 대개 현실이 된다. 이 사회 중심 주인공으로 40년 살았다면, 이 사회 어른 혹은, 애물단지로 40년이 남았다. 정치판이든 경제판이든 곽 부장님들이 괴성을 지를 때마다 완강했던 기존 질서가 썩은 어금니처럼 흔들리곤 했던 기억들을 보유한 세대.    

  

맹 팀장은 바쁘다. 그에게 곽 부장은 선배이기도 하고 상처이기도 하다. 나보다 더 좋은 선배 있으면 나와 보라고? 쌔고 쌨다, 곽 부장이여! 착각하지 마시길. 바쁘신 후배 화장실 가는 시간이나 보장해주라. 인생 1막 이켠과 저쪽의 온도는 현저히 다르다. 인생 2막에 든 곽 부장님을 합리적 지성의 관점에서 보면, 위기다. 한평생 쌓아왔던 자존과 자긍이 허무하게 무너질 위기. 새까만 후배 맹 팀장이 카운트하지 않더라도 당신 안에서 지금 막 오작동이 시작된 인연의 톱니와 40년 묵은 서열과 권위의 자동화 시스템이 빠지직거리고 있다.  

    

이런 부작용을 치료하는 치료제가 있다. 명상이다. 7만 환자에게 직접 명상 프로그램을 적용해본 존 카빗 진이라는 미국 의사가 권했다. 어지간하면 자신의 내면에 자동화된 의식을 가만히 지켜보시라고. 우리나라에 ‘마음 챙김을 기반으로 한 스트레스 감소 프로그램(MBSR)’이라는 품명으로 알려진 그의 권유는 단순하다. 일단, 자신의 몸 감각만이라도 잘 지켜봐 다오, 그러면 당뇨, 류머티즘, 고혈압, 심장병 따위가 현저히 좋아진단다. 미국의 여러 주정부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의료보험 체계 안에 넣기도 한다.     


≪너의 내면을 검색하라≫는 베스트셀러로 알려진 차드 멩 탄이라는 구글 출신 명상 지도자가 있다. 그 또한 곽 부장 님에게 권한다. 진중하고 느긋하게 자기 관찰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한평생 온 존재를 던져 구축해온 존엄을 깨트리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당신의 자긍과 자존을 위해서라도 이제 마음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고 권한다. 


그동안은 자신에게 집착했음을 먼저 인정해보자. 어쩌다 보니, 가족과 먹고사는 일이 삶의 전부였고, 불문율이었으며, 최우선 가치였다. 이제,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공간이 열렸다. 나에게서 나를 거리 두고 바라보는 일. 헐떡이며 달려온 길을 돌아보면서 이래저래 상처 입은 자신을 위로해주는 시공간 속에 고요히 머물러보기.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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