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섬돌 Jan 06. 2023

명상은 스스로 드러내고
살피는 일이다

괴로움이야말로 냉혹할 정도로 자기 몫이다

강원도 어느 명상 마을에서 만났던 한 덕운 씨의 부음(訃音)이 왔다. 본인은 이미 이승의 사람이 아니었을 터인데, 그의 이름과 사진이 박힌 SNS로 부고가 왔다. 휴대 전화기 시스템만 놓고 보면 본인이 본인의 부음을 알린 격이다. 나는 그의 부친이 돌아가신 것으로 착각했다. 부고(訃告) 맨 윗단에 적힌 고인의 이름을 보면서도, 흰 이가 가지런한 그의 웃음만 떠올리면서 시선을 죽 내렸다. 덕운 씨 아버님이 여태껏 살아계셨나? 하면서. 맨 밑단에 부음을 알리는 사람의 이름이 낯설어서 다시 맨 윗줄로 올라와봤다. 고인(故人), 이라고 쓰인 단어 옆에 세미 콜론 그리고, 그의 이름 석자가 쓰여 있었다. 고인 한 덕운. 부고자(訃告者)는 그의 아들이었다.

      

지난해 12월에는 30대 후반 여성 제자의 부음을 받았다. 그것도 이미 장사를 지낸 후, 몇 주 후에야 알았다. 그해 6월까지도 명상 수업에 나왔기 때문에 그녀 표정과 목소리를 잊을 리 없었다. 그런데 이승을 하직했단다. 그녀와 나는 5개월 정도 무소식이었다. 그동안에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망연자실했다. 그 몇 달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야? “고인이 절대로 주변에 알리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해서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그녀와 함께 수업받았던 사람이 말했다. “그럼 수업할 때도 한창 병중이었네요?” “네, 그때도 그랬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 그렇게 쾌활하려고 애썼죠. 병에 관해선 말도 못 꺼내게 해서….”

      

두 사람의 부음만이 아니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멀고 가까운 주변 친지만 해도 열 분이 넘는 인연과 작별을 했다. 그런데도 이 두 사람이 선명히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각별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더해 이 분들로부터 특별 ‘메시지’를 받은 느낌 때문이다. 어느 죽음인들 애통하지 않으랴만, 두 분은 비교적 젊은 데다 현장에서 활동 중이었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소식이 끊겼는데도 이런 이별까지 감당해야 할 줄은 상상할 수 없었다.     

 

되돌아보면 그 두 분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의 병증에 대해 주변에게 함구했다는 점이다. 물어볼 순 없었지만, 스스로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지 않았을까.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았을 터이다. 그 또한 이해가 될 법한 것이, 한 분은 물 좋고 산 좋은 삼림욕장 안내가 주요 업무였고, 또 한분은 누가 봐도 건강한 육신을 갖춘 요가 선생님이었다.     


괴로움이나 상처를 대하는 태도가 어떠해야 한다는 공식은 없다. 괴로움이야말로 냉혹할 정도로 각자 몫이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건, 서로 손을 맞잡아 본 것으로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내가 그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그에게 나의 손이 따뜻하냐고 묻는다. 그는 나의 손 상태를 어느 정도까지 정확히 알 수 있을까. 내 손을 잡았을 때 그의 손이 차가우면 내 손은 따뜻했을 것이고, 그의 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면 나의 손이 차가웠음을 의미할 뿐이다. 상대적이다. 어느 누구도 차가움과 따뜻함의 기준이 될 수 없다. 결국은 ‘내 손에 비해’ 당신 손이 따뜻하다,라는 게 정답에 가깝다. 괴로움이든 기쁨이든, 모든 감각이나 감정, 생각 따위는  같은 원리다. 정해진 기준 없음. 철저히 각자 몫이다.    

  

서로의 내면은 비밀 왕국처럼 각자 존재하지만 내면에서 들끓는 여러 에너지가 완벽하게 차단되는 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담장 안쪽 공기가 허공의 바람이 되기도 하고 수증기와 뒤섞여 빗물이 되어 담장 밖을 넘어서는 것과 같다. 인간의 감각기관으로는 잘 알아차릴 수 없는 에너지들이지만 이것들의 속성은 ‘이동성’과 ‘자유’다. 생각이나 기억도 에너지장이라고 볼 때, 에너지는 시공간을 사통팔달로 소통한다고 봐야 한다. 당신이 말을 하고, 무언가를 바라보고, 눈물짓고, 침을 흘리는 이유도 흐름의 원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모든 존재들은 흐름과 교류의 원리에 따르고 있다. 자기 안에 암덩이가 있으면 암덩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흐름의 원리다. 훈장이라도 탄 것처럼 떠벌이라는 말이 아니다. 말이 너무 많으면 내면이 말라붙는다. 말라붙을 정도로 흘려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안의 고통에 대해 숨기거나 감추는 것은 차단행위다. 수용전념치료 요법으로 널리 알려진 스티븐 헤이스는 저서 ≪마음에서 빠져나와 삶 속으로 들어가라≫에서 온갖 고통에 대한 경험 회피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반면에 어떤 고통이든 그것을 ‘기꺼이 경험하려는 의지’는 삶과 죽음의 문제 이전에 물의 흐름처럼 자연스럽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