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의 고깃덩이 어른(3, 끝)

by 윤지수

애매하게 살았다.

죽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러는 행복도 했지만 동시에 찝찝했으며 나는 언제나 그의 환영을 봤다.

심지어는 다른 이의 손을 잡고 걷는 순간에도 내 옆에는 그가 있었다.

밤은 사무쳤고, 낮은 몽롱했다.

신경질적이었다가 무심해졌다가 우울했다가 이내 가라앉았다가, 죄 엉망이었다.

그리고 알았다.

아, 그때 선생님도 이런 시간을 보내고 계셨겠구나.



저렇게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게 살 거라면 연락을 해 보던가 하시지-했던 주제넘은 속 핀잔이 10년도 채 흐르지 않아 고대로 나에게 돌아왔다.

지수야, 고작 이렇게 살 거면, 겨우 이까짓 하루를 보낼 거라면, 그럼 다시,.. 그러나 그때의 선생님처럼 나도 그에게 다시 갈 수 없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고,

세상엔 그렇게 절대의 영역도 있는 거였다.

그때의 우리가 그랬다.




처음에는 잊으려 부단했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는 명문장에 기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앞에 썼듯 새 사람과 걸어도 언제나 나는 당신과도 함께 걷는 중이라 효과가 미미했다. 그게 누구 건 어쨌든 당신이 아니기에 내게 의미롭지 못했다.

다음엔 생각할 틈을 주면 안 된다기에 일을 늘려 바쁘게 지내보았다. 무리스러운 스케줄을 잡고 약속도 주렁주렁 캘린더에 빼곡 매달았다. 바쁜 건 확실히 효과가 있었지만 밤엔 여전히 사무쳤다.

운동을 시작했다. PT를 등록하고 매일 2시간씩 몸을 혹사시켰다. 근육통으로 온몸이 욱신거렸는데, 그보다 마음이 더 그랬다.

그리고는 포기했다. 잊는 거, 안 되는가 보다. 세상엔 이런 일도 있는가 보다. 제대로 살긴 다 글렀구나.

그리고는 이해했다. 그런 때는 잘 오지 않는다는 선생님의 말이 진짜였다.

서슬퍼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나는 스물넷에서 스물일곱이 되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거주지가 바뀌었고 졸업 예정 대학생에서 직장인이 되었다.

그게 언제 그렇게 되었는가는 모르겠지만 잘 오지 않는 때가 다행히 왔다.

스물일곱 말미에는 확실히 괜찮아졌다. 나는 종종 당신 생각을 하긴 했지만 새삼하는 생각이 됐고 사무치는 밤도 그때부터는 없었다.

걸리적거리는 부분 없이 시원하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안 될 줄 알고 포기했었는데. 선물처럼 그런 때가 와주었다. 초심자의 행운 같은 것이려나. 첫사랑만 평생 앓다 끝날 인생인 줄 알았는데.

스물넷에 당신과 헤어진 나는 스물일곱 끝에야 당신과 진짜 이별할 수 있었다.

더는 당신을 앓는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되는 거, 그게 가장 좋았다.


이 글을 쓰며 이제는 꽤 오랜만에 당신 생각을 한다.

당신이 쓰던 향수, 그 향이 뭐였더라. 정말 좋아하던 향이었는데.

흔한 향이라 인파 가운데 있음 꼭 한두 명 정도는 그 내음을 풍기곤 했었는데.

그래서 강제로 당신 생각을 하게 하는 그런 향이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당신 키가 정확히 몇이었더라. 180 몇이라고 했는데, 정확히 몇이었지. 뭐더라.

당신은 이제 골똘해도 생각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다음 사랑도 했다.

당신을 완벽히 소거한 스물여덟 여름에 했다.

나는 당신이 아니면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당신과 닮은 사람이라 사랑한 것도 아니고 그냥 정말 그 사람이라 사랑하는, 내가 당신을 사랑하듯 애틋한 그런 사랑을 다시 했다.

실은 사랑하지 않으려 했었다.

어려서 내가 가장 되고 싶지 않다고 한 어른, 나는 바로 그런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뛰어들기보다는 에둘렀고 연연할 바엔 돌아섰다.

용기는 잃고 겁만 잔뜩 늘어서 사랑 앞에 잔뜩 망설이고 있었다.

또 감옥 같은 시간을 보내야 할까 봐 시작도 전에 잔뜩 움추러들어 있었다.

무채색의 고깃덩이 어른. 나는 그 어른의 흉내를 내며 마음을 꾹 눌러 넣었으나

그렇게 될 일은 결국 그렇게 되는 것처럼 사랑은 내 완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였다.




두 번째 사랑을 하면서는 이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았기에 보다 신중하고 조심스레 굴었다. 연약한 객체를 다루듯 아껴 다뤘다. 고작 삼 개월 사랑한 사람을 잊는데 그 품을 들였으니 이번엔 못해도 곱절은 더 들 게 뻔했으니까.

조심하고 고심했지만 그와 나는 인연이 아니었다.

오래 고민하고, 미리 많이 울고, 엄청 연습을 한 끝에 이별을 택했다.

만약 그 무게를 모르고 헤어졌다면 나는 지금도 그로 인해 속상하는 중이었겠으나 다행히 첫사랑에게 잘 배워두어서 다음 사랑과는 꽤 잘 이별했다.

경력직이 이래서 좋은가.

하지만 잘 이별했다고 슬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주지하였듯, 두 번째여도 사랑은 사랑이었으니까.





두 번째 사랑과 이별을 하면서는 일기장에 그런 글을 썼다.

무채색의 고깃덩이 어른. 그게 제일 베스트. 사랑은 쓰레기.

그 누구도, 다시는, 절대로, 사랑하지 않을 것.

스스로에게 하는 저주 같은 다짐을 주에 한 번씩은 꼭 썼다.

원래도 아픈 걸 잘 참지 못하지만

사랑에 아픈 건 정말이지 내성도 없어서 그냥 곧이곧대로 아파야 하며

정해진 값만큼을 성실하게 다 아파하고 나야만 괜찮아질 수 있었다.

사랑 그거 결국 이렇게 아파야 하는 거라면 나는 사랑 같은 건 다신 하지 않겠다.

사랑은 쓰레기. 진짜 쓰레기. 사랑은 머저리. 완전 머저리.

사랑 옆에 나쁜 단어들을 죄 붙여 사랑을 욕보였다.


그래도 내가 스물넷 때보다는 좀 크긴 컸는지 그때보다 조금은 성숙한 생각도 했다.

행복했으니 아픈 거고. 좋았으니 슬픈 거고.

행복한 만큼 아픈 거고. 좋아한 만큼 슬픈 거고.

이별통은 사랑의 깊이와 비례하기에 사랑한 만큼 통증이 큰 거라.

내가 이렇게 아픈 건 그만큼 행복했었기 때문이라는 거, 그걸 빼먹지 않고 챙겨 생각했다.

그러니 억울한 맘은 좀 풀렸다.

아픈 건 똑같이 아팠지만, 아플수록 오히려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었고

우리 사랑이 나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 되었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인생은 제로섬 게임이고, 결국 조삼모사고, 카르마고, 돌고 도는 거고 그런 거라더니.

사랑도였다.

다시 썼다. 사랑 쓰레기. 사랑 비효율 끝판 완전 멍청이. 사랑 바보. 사랑 꺼져.

다시 말하지만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어서

사랑이 미운 건 여전했다.









올해 서른이 됐다.

서른 된 오늘의 나는 아무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앓고 있는 이도 없다. 가히 완벽한 상태다.

사랑하고 싶지 않다.

다시는 내내 그리워만 해야 하는 밤 같은 거 맞고 싶지 않다.

괜찮은 척 웃고 싶지도 않고 괜찮다는 거짓말도 하기 싫다.

어떤 이름도 들이고 싶지 않다.

아무와도 그 어떤 관계도 맺지 않고 그냥 이대로.

심플하고 깔끔하게 살고 싶다.


줄곧 퉁명스럽게 굴었다.

그간 내게 이성적으로 다가오는 이에게 얼마나 쌀쌀맞게 굴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누구와도 사랑하지 않을 겁니다. 수문장을 단단히 배치시키고 날을 잔뜩 세워댔다.

그런데, 지난 겨울을 혼자 보내며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진짜인가?

나는 진짜, 정말로 사랑이 싫어졌는가?


더운 여름날 땀에 젖을 정도로 달려 가 안겨도 좋고,

그를 위해 종종 거리며 밥을 해주며 기쁘고,

가을 내내 뜬 스웨터를 입동과 함께 선물하며 행복하고,

사랑한다고, 정말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긴 맘을 뱉어주고,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함께 보고 추억을 쌓고,

고맙고 벅찬 순간들을 선사하는,

그런 사랑이 나는 정말 하기가 싫어진 걸까.

나 진짜 그 사랑.

그 벅찬 사랑까지도 몽땅 다 미워진 걸까.


그게 아님, 실은 이별이 두려우면서 사랑이 싫다고

스스로의 찌질함을 감춰 사는 그냥 보통의 어른이 된 걸까. 헤어지는 게 힘들어서 사랑 앞에 비겁하게 색을 감추는 멋없는 어른이 된 걸까.



물어 뭐 하나.

후자지.








이제는 선생님의 모든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어른들이 마음을 잘 열지 않았던 거구나.

상처받고 싶지 않아 선택된 자연적 결과였다.


사랑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고, 이별하고 싶지 않은 건데.

이별 없는 사랑이라는 건, 무조건 오르는 주식 같이 말이 되기가 어려운 조건의 것이라 바라기 어려운 것이니

보다 쉬운 고독을 택하는 거였다.


나는 사랑할 때 행복했다.

더없이 따듯했고,

정말 좋았었다.

나는 그렇게 행복한 사랑을 다시 하고 싶은 것 같다.

대신, 말 안 되는 조건인 거 모르지 않지만 헤어지지 않을 사랑을.

죽음만이 우리를 갈라놓는 그런 사랑을, 나는 하고 싶은 것, 아니 하고 싶다.

그렇게 다시 없을 사랑을, 나는 하고 싶다.

사랑까지 미워진 건 결코 아니었다.







열여덟의 지수야, 그게 다 이유가 있는 거더라.

다 잘 아는 어른이 되어보니 알겠더라.

그들이 못나서가 아니라

그게 아주 자연히 그냥

무채색의 고깃덩이처럼 굴게 되는 거더라.

그래야 살아지는 거더라.

사랑은 그렇듯 잔인하기도 한 거더라.


그래도 나는 하고 싶어 해.

네가 우려했던 그런 모습의 어른이기도 하지만

한 편 아니기도 해.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끝.




















여기까지 다 읽어주신 분이 계시다면,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뭐가 됐든 일단 꾸준히 쓰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 글은 주제를 받아볼까 싶습니다.

주제를 댓글로 추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존경하는 노희경 작가의 말을 빌려, 하나만 더 놓고 가겠습니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입니다. 사랑받은 대상 하나를 유기하였으니 그 죄가 크고 명확합니다.


어느새 다가온 봄, 다들 죄짓지 말고 삽시다.

일단 저부터 해보겠습니다.

쉽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해보려 노력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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