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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Mar 24. 2023

이것은 영광도 소문도 흔적도 없는 나의 용서다.

<더 글로리>를 보며, 나의 연진이에게 보내는 편지


김은숙 작가는 딸이 건넨 질문에서 [더 글로리]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엄마는 내가 누구를 죽도록 때리고 오면 가슴이 아플 것 같아? 아니면 죽도록 맞고 오면 가슴이 아플 것 같아?”


나는 죽도록 맞아봤으니, 이번엔 죽도록 때리는 편을 선택하겠다.


오빠는 내 생일이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매번 같은 문구로 편지를 써줬다. “많이 때려서 미안해, 앞으로는 사이좋게 잘 지내자” 나는 똑같은 내용의 편지를 수년 동안 받았다. 2살 터울인 오빠는 나를 자주 그리고 습관적으로 때렸다. 매번 트집 잡을 것을 찾고, 방문을 열어 나를 확인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속수무책으로 맞았다. 부모님은 오빠를 훈육했으나, 항상 부족했다. 예방이 아닌 후 조치였으며, 그것은 훈육이 아니라, 또 다른 폭력이었다. 폭력은 회전목마처럼 돌고 돌아 결국 내게 왔다. 부모님한테 일러도 맞고, 안 일러도 맞으니,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유를 기억할 수도 없는 사소한 이유로 맞았다. 그러다 하루는 이마를 맞아서 큰 혹이 생겼다. 만화에서 꿀밤 맞으면 생기는 혹이 진짜로 생겼다. 만화는 과장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날도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큰 소리를 듣고 내 방으로 와 이마를 보고 말씀하셨다. “안 없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냐 나는 모르겠다” 회피하면서 거실로 돌아갔다. 오빠는 미안하다고 울었다. 우는 이유가 나를 때려서가 아니라 혹이 그대로일까 봐, 잘못이 사라지지 않을까 봐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날은 매일 가던 독서실엔 안 가고 종일 방에만 있어야 했다.


이 폭력은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면서 끝났다. 오빠보다 발육 상태가 좋았던 내가 몸싸움에서 질 리 없었다. 제대로 싸운다면 오빠 따위는 단숨에 이길 수 있었다. 이길 수 있었는데도 맞는 것이 습관이 됐다. 그러다 하루는 매번 분풀이 대상이 된 것이 악에 받쳤다. 도무지 참을 수 없어 도깨비 얼굴을 하고 마구 두들겨 패주었다. 내가 맞은 그대로, 정신없이 한껏 때려줬다. 오빠는 코피를 흘렸고, 목놓아 엉엉 울었다. “악마야 악마” 오빠가 나를 보고 말했다. 나는 악마의 얼굴을 드러내며 마침내 승리했다.


‘숨 쉴 틈 없이 맞아보니 어때?’ 나는 때리고 나서 아주 속이 후련했다. 오빠는 놀라 울면서 딸꾹질을 했다. 숨을 좀 돌리고 나서 오빠는 나를 또 때렸다. 이번에는 불쌍해서 그저 맞아주었다. 그날, 내 도깨비 주먹이 정말 대단했는지, 맞는 일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진작에 때려버릴걸, 진작에 딸꾹질하면서 목놓아 울 만큼 때려줄걸, 참는다고 해결되는 게 없는데 너무 오래 봐줬다.’


정의는 쉽게 실현되지 않는다. 주먹으로 맞은 것을 주먹으로 대갚음해 줬으니, 이것은 정의 실현이 아니다. 폭력의 앙갚음이다.

4명이 사는 집, 2명의 어른과 2명의 아이가 사는 곳에서도 정의는 실현되지 못했다. 애들끼리 싸우는 게 아니라, 나는 늘 피해자로 폭력에 노출되었다. 그러다 한번 때렸을 뿐인데, 너도 그때 때렸다는 기억만 두 어른들에게 아로새겨주었다.

 

어른이 돼서 심리 상담을 받았고, 상담 선생님이 말해주었다. ”그때 오빠는 어렸잖아요, 지금 어른인 보름달씨가 그때의 오빠를 용서해야 해요”. 나는 대답했다. “저는 그때 오빠보다 더 어렸는걸요”


용서라… 어린아이가 맞았는데 어른인 내가 맘대로 용서해도 되는 걸까?


크리스마스도 오빠 생일도 아직 멀었지만, 편지를 보낸다.


To. 나의 연진이, 우리 오빠에게


어른은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하지 않고, 덮어둔다.
적어도 내 어른들은 그랬다.
아이는 숨고, 이제 기억을 덮고 싶은 어른 넷만 남았다.

아이는 기억한다. 어른이 된지 한참이 지났는데 잊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꾸짖거나 벌하지 않는다.
어른은 덮어두었고, 묻어 두었다. 영광도 소문도 흔적도 없이.

완벽하지 않아도 이것은 나의 용서다.


From. 도깨비 주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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