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름달 Mar 18. 2023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버거울 때, 카페에 간다.

카페 안에는 나만의 NPC가 살고 있다


약속한 적 없는 사람을 만나러 카페에 간다. 우리는 만남을 약속한 적이 없으니, 만난다는 표현보다는 스친다는 말이 더 좋겠다. 카페 안, 사람들은 소란스럽게 들어서고, 소리 없이 사라진다. 애초부터 누구의 소유도 아닌 카페 자리는 그 시간대, 그 사람에게 온전히 점령당한다.

파도는 해변의 모래알을 삼켰다 뱉어놓고, 시간은 사람을 잡아두었다 놓아준다. 사람들은 조용하고 은밀하게 카페 자리를 놓고 싸운다. 우리는 카페에서 각개전투를 펼치는 병사가 된다.


나는 매일 오전, 각개전투에서 승리한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각자가 점령한 자리에서 독립적이고, 자발적이며, 자유롭다. 내가 점령한 이 자리에선 가만히 있어도 자동으로 화면이 전환된다.


사람들은 발을 가만두지 못한다. 신발을 벗어놓고 양반다리를 한 사람, 쉴 새 없이 다리를 떠는 사람, 다리를 꼬고 있는 사람, 꼬아 놓은 다리로 리듬을 타는 사람. 카페 음악은 무시하고 이어폰을 낀 사람.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 연신 헛기침하는 사람들까지. 카페 안, 나는 그들의 NPC이고, 그들은 나만의 NPC다. 우리는 서로가 신경 쓰이지만 상관없는 듯 행동한다. 갑자기 등장한 NPC가 바로 옆자리에서 대화를 시작한다. 나는 그들의 대화 흐름을 쫓아가면서도 관심 없는 척한다. 그들은 내가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애써 모르는 척한다.


NPC : Non Player Character 게임 플레이어의 반대개념.
플레이어(사용자)가 직접 조작하지 않는 캐릭터로 구경꾼이나 상인일 수도 있고, 동료나 적일 수도 있다


[0번 NPC] : 게임에 등장하는 단골 캐릭터


단발머리 중년 여성은 항상 인상을 찌푸려 미간 사이가 가깝다. 테이블에 독서대를 놓고 진지하고 골똘히 책을 응시한다. 그녀는 네모난 안경알을 넘어서 전투 중이다. 하지만 그녀의 전쟁터에는 적이 없다. 콘센트도 없고, 등받이 쿠션도 없는 그 자리는 늘 쉽게 그녀 몫으로 돌아간다. 게임의 시작 화면처럼 항상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반복된다.


[1번~10번 NPC] : 공부할 장소가 필요한 캐릭터


시험, 과제, 면접 등을 준비하는 사람들. 적당한 백색소음을 선호하는 사람들로 중간, 기말고사 기간이 되면 이 NPC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번식된다. 조용하고 흔해 딱히 관심이 가지 않는다.


[11번~24번 NPC] : 만남이 필요한 캐릭터


친구 모임, 학부모 모임, 보험사 직원과 고객 등. 쉴 새 없이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사람들. 까르르 숨넘어가게 웃고, 흥분하며 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옥신각신한다. 관심사가 겹치지 않아 음소거 처리한다.


[25번~26번 NPC] : 근무할 장소가 필요한 캐릭터


코로나로 재택근무하는 직장인 또는 미팅 전, 짬을 낸 영업 사원이 보인다. 그들은 정신없이 바쁘고 쉴 새 없이 통화한다.

카페에서 일하는 개발자는 알 수 없는 명령어와 초록, 검정, 하양, 빨강, 수많은 엔터키로 내려진 배열들과 싸움한다. 카페의 무채색을 뚫고 나오는 그의 모니터는 우연히 들은 외국 노래처럼, 내용은 모르지만 자꾸 눈길이 간다.


[27번~35번 NPC] : 핸드폰만 하는 캐릭터


혼자 오든, 일행이 있든 핸드폰만 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두 종류다. 하나는 음료를 마시고, 일찍 자리를 뜨는 사람, 다른 하나는 종일 자리를 지키는 사람.


[36번~43번 NPC] : 취미 생활 즐기는 캐릭터


노트북으로 영화나 드라마 또는 예능을 시청하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아이패드로 사부작사부작하거나 가벼운 뜨개질을 하는 사람들. 그중 가장 신기했던 캐릭터는 수채화 물감과 물통을 가져와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다.


[100번 NPC] : 진짜 전쟁 중인 캐릭터


카페에서 싸우는 연인들. 종종 마주치는 100번 NPC는 내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하다. 100번 NPC가 카페를 진짜 전쟁터로 만들면, 나는 그들에게 온 신경이 쏠린다. 두 눈은 눈치껏 내 자리를 지켰지만, 두 귀는 100번 NPC 자리로 파견됐다. 끼어들 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 100번 NPC가 자리를 뜨면, 더 듣고 싶어도 붙잡을 수 없어 아쉽다. 다시 만날 일 없는 연인의 싸움은 늘 진부한 주제로 시작되지만, 그 과정은 언제나 흥미롭다.


[101번 NPC] : 보름달 캐릭터


아이패드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아이패드&핸드폰 충전을 위해 콘센트가 있는 자리를 좋아한다. 오래 앉아 있으면 엉덩이가 아파 푹신한 소파 자리를 선호한다. 음료는 라테를 주로 주문하는 데 요즘 들어서는 드립 커피도 자주 마시곤 한다. 가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기도 하고, 안 보는 척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한다. 때로는 우울해 보이기도 때로는 명랑해 보이기도 한다. 여러 번 퇴고해도 끝내지 못한 글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읽어본다. 오래 두고 읽어도 좋은 글을 쓰고 싶어 한다.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버거울 때, 카페에 간다. 만날 사람이 없고, 일할 거리가 없고, 싸울 일도 없지만, 카페에 간다. 카페에는 각개전투를 펼치는 나만의 NPC가 산다. 때로는 하루하루가 고달프고 지겨운 사람들이 산다. 카페 문이 열리면 그들은 파도가 뱉어놓은 모래처럼 쌓이고, 문이 닫히면 시간에 삼켜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