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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정엽 대만은 지금 Feb 18. 2021

고통은 인생의 기본값이 될 수 있을까

사랑하기에 고통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고통을 사랑해줄 수 있다면


‘고통은 인생의 기본값이 될 수 있을까?’


누구나 말 못 할 고통은 적어도 한 가지 씩은 있기 마련이다. 나에게로 다가온 고통을 버티고 버텨 간신히 이겨내 숨 좀 돌릴까 하면 다시 예상하지 못했던, 생각한 적도 없는 일이 터진다. 이는 또다시 나에게  고통으로 다가온다.


이때 사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으며, 이는 곧 고되다 못해 가슴이 미어지고 찌르는 듯한 통증을 유발한다. 그리고 이것이 되풀이되면서 일상이 된다. 자기한테만 고통이 생기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통스러움을 느끼고, 고통에 시달리고, 고통을 참지 못해 스스로 폭발한다. 하지만 그 고통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고통에 대한 감정의 폭발은 또 다른 고통을 유발한다.


고통은 고통을 만든다. 우리는 이것을 만성 통증으로 여긴다. 만성이기에 습관처럼 아파도 아프지 않은 것 같아야 하지만 이러한 통증은 느끼면 느낄수록 예전의 고통까지 불러내 통증이 배가 된다.


고통은 세상과 소통을 단절시킬 수 있다. 아픈 내가 남을 바라보면 나와 정반대의 모습만 보이기 마련이다. 지인들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이 원치 않아도 툭툭 튀어나오면서 이들이 웃고 즐기는 모습을 보면 고통을 안고 있는 나는 세상과 점점 단절되어 가는 기분과 함께 자존감은 뚝뚝 떨어진다. 이는 또다시 나에기 고통을 안겨준다. 고통받는 사람의 주변인들에게는 그 사람이 느끼는 고통이 보이지 않는다. 고통이 그 사람에게 가져다준 결과만 보일 뿐이다.


고통의 통증은 자극으로 낮디 낮은 역치를 가진 사람들에게 찾아오고 역치 이상에서 일정해야 할 반응의 크기는 비례한다. 고통은 감각세포와는 전혀 상관없기 때문에 그럴까.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고통의 강도와 관계없이 고통은 고통으로 다가온다.


고통이 지속되면서 수년, 수십 년이 흘러도 마음 깊이 고통으로 남아 있다면, 그 고통이 추억의 한 순간이 아니라면 치유될 수 없는 상처 ‘트라우마’로 남는 것 같다. 같은 트라우마도 누구에게서 받은 것인가에 따라 통증과 크기는 다르다. 외압에 의한 물리적인 원인에 의한 트라우마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사랑하는 관계에서 고통과 트라우마가 시작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한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면 고통과 트라우마를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2021년 2월 초 대만의 유명 의사는 페이스북을 통해 죽고 싶은 환자와 환자를 살리고 싶어 하는 그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했다.  폐부종 및 천식 등을 앓고 있는 60대 여성 환자는 호흡 부전으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곁을 지키던 아들이 재빨리 당직 의사를 불러 응급 처치를 하여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체내에 관을 삽입한 이 환자는 기관 절개 수술을 마친 뒤 주치의를 부여잡고 “목이 아프다. 물을 삼키면 아프다. 모르핀으로 안락사하고 싶다”는 내용의 17글자를 젖 먹던 힘을 다해 종이에 써서 주치의에게 간청했다.


현재 이 환자와 아들의 고통은 무엇일까? 분명 다른 종류의 고통일 것이다. 환자는 너무 아픈 나머지 안락사를 원했을 것이고, 어떠면 아머니로서 아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들이 병시중을 들며 고생하는 모습도 환자에게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환자의 아들은 어머니가 편찮다는 것에 그리고 혹시 모를 이별이 대한 두려움과 아들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고통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만일 아들이 그의 어머니가 안락사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또 다른 고통을 느낄 것이다.


고통은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손해, 적자, 피해로 촉발된 감정 정도로 생각된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러한 고통에 ‘때문에’라는 표현을 씌워 남 탓부터 한다. 하지만 그래도 고통은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이어 다른 고통이 또 찾아온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며 피하지도 말라고 한다. 미안하지만 여기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고통에 대해 느끼고 싶지 않아도 느껴지는 감정의 일부분이요,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것이 고통이다. 그렇다. 이것이 인생이다.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숨을 쉬고 있는 한 말이다.


고통을 인생의 기본값으로 여겨봄은 어떨까? 그냥 고통은 고통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두렵고 아프다고 느끼는 것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냥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사랑해 주는 것은 어떨까. 사랑하기에 고통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고통을 사랑해줄 수 있다면, 고통은 우리 곁에 둬도 괜찮은 녀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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