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_04

by 나우히어



희진, 내 딸아이의 이름이다.


남희, 희진. 나의 소중한 두 사람. 내가 책임지고 내가 보살펴줘야 하는 두 사람.


“희진 아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남희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얼마나 정신없이 왔는지 머리 한쪽이 삐죽 삐져나와있다. 눌러주려고 손을 뻗는데 손과 팔에 무슨 선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어제 자러 들어갔잖아. 그런데 언제 나간 거야? 새벽에? 나가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내가 언제 나갔더라. 아침에 신문을 가지러 나갔었나.

“모..라..”

“아침에 일어났는데 없어서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모..라..”

“하루종일 걱정돼서 일이 손에 안 잡히더라. 그래도 이렇게 보니까 안심이네. 중앙동은 왜 간 거야?”

중앙동이라. 중앙동이면 내가 대학 졸업 후 들어간 첫 직장이 있던 곳인데..

“모올..라..”


학창 시절 내내 나름 촉망받는 학생이었던 나는, 당시에는 서울대 다음으로 쳐주던 부산의 한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 후, 금융회사에 입사하였다. 고등학교 때 교지편집부장, 대학교 때 학생회장을 했던 이력 때문일까 수습 3개월 후 나는 신규사업부의 영업팀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젊은 혈기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영업팀 발령에 큰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성취감보다는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었고 결정적으로 내 사수라는 사람이 나와는 대척점에 있는 유형이어서 나는 하루하루 메말라 갔다. 그 시절 내가 유일하게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었던 때는 남희를 만날 때였던 것 같다.


남희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첫 만남 이후, 나 혼자 일방적으로 1년 남짓 편지를 보내다가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기다리다 지쳐 자연스럽게 멀어진, 아니 가까워진 적이 없으니 멀어질 것도 없이 그냥 흐지부지 되어 버렸었다. 그런데 대학 캠퍼스에서 우연히 그녀와 맞닥뜨린 후 우리는 요즘 말로 하면 썸남썸녀로 지내게 되었다. 군대를 면제받은 나는 남자동기들보다 빨리 취직을 하게 되었고, 취직 후 본격적으로 남희와 사귀게 되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거의 평생을 함께한 사이다.


“조상준 님,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세요?

생년월일, 그래 나도 그걸 생각하고 있었는데. 남희와 몇 년을 함께한 건지 싶어서. 생일은 기억이 나는데 태어난 년도는 헷갈린다.

“모올..라..”


“참나, 다 모른다고 하면 어떡해.”

“보호자분, 아직 환자분이 좀 헷갈리시나 봐요. 조금 있다 다시 올게요.”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남희의 얼굴과 머리도 빗지 못하고 달려온 메마른 남희의 얼굴이 번갈아가며 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삐 삐 삐. 규칙적인 기계음이 들려오고 눈이 부시던 형광불빛이 깜박깜박거리더니 어느새 캄캄해진다. 그래도 내 왼손을 잡고 있는 남희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니 마음이 편안해져서 실로 오랜만에 편안하게 숨을 내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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