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디에도 없는 사람 Oct 23. 2021

나아지고 있는 중이야

2부 나아지는 감각

#적어도자기는알아야한다

#느리고점진적인확실한변화


일주일 만에 요가교실로 돌아갔다. 수업 후 교실을 빠져나가는 내게 빡빡이 선생님이 인사를 하셨다.

"오랜만이네".

나도 "네" 하고 그냥 돌아서려다가 "선생님 사실은요...." 하면서, 그간의 속사정을 더듬더듬 털어놓았다. 아쉬탕가 수련을 시작한 이래로, 지난 몇 달간 일주일에 5일 이상을 요가교실에 와 수련을 했다. 그 몇 개월 흘린 땀이 평생 흘린 땀보다도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러 달이 지나도 전혀 완성되지 않는 자세가 여럿이었다. 그중 제일 좌절스럽게 하는 자세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회원 하나가 내 옆에서 힘 하나 들이지 않고 그 자세를 완성하는 것을 봤다. 그날, 고질적이었던 어깨 통증이 순간 참을 수 없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일주일 요가교실에 가지 않았다. 아픈 어깨를 쉬게 한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실은, '난 아무래도 되지가 않잖아.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쉽게 돼? 불공평해. 이런 일엔 더 노력하고 싶지 않아. 잘하고 싶은데 왜 안 되는 거야. 부끄러워, 몸 바보 같아, 창피해' 이런 맘이었다. 그렇게 스스로 토라졌던 것이다. 일주일이 흘렀고, 다시 요가를 하고픈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내 말에 선생님은, 그랬던 거냐며 굉장히 놀라 하셨다. 그러면서, 자기가 오랜 시간 사람들을 지켜보니, 실력이 향상되거나 진보가 있기 바로 전에 보통 그런 심리 상태가 나타난다고 하셨다.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을 때. 거기서 아주 조금만 더 시간과 노력을 지속할 때 그 계단을 뛰어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질문을 하셨다.

"네가 만약 10년을 수련했는데 여전히 같은 자세가 안될 때, 마음이 어떨 것 같아?"

시, 시, 시, 십 년이요? 바로 깊은 한숨부터 튀어나왔다. 그런 생각은 하기도 싫었다. 지금 몇 달 하고도 안 돼서 분통 터지는데, 10년이라뇨, 선생님, 무슨 그런 심한 말씀을.

"그것도 하나의 진보라고 생각이 안 드니?"

네? 뭐라고여? 선생님 말씀은, 인간의 몸은 10년 동안 노화하기 마련이고, 예전엔 가능하던 자세가 안 되는 수도 있다고. 계속 같은 체력과 노력으로 그 자리에서 투입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진보라고. 계속 흐르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수련이라면 물살에 휩쓸려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했다.  

學如逆水行舟,不進而退 [1]
배움은 물을 거슬러 배를 젓는 것과 같아서, 나아가지 않으면 곧 밀려난다


 

우리 빡빡이 선생님은, 정말 비구니이신 걸까.(아직도 정체를 모르겠다, 여자분인데 빡빡이이고, 혼자 요가 교실 한 켠 방에서 사신다) 경지에 이른 분 같다. 매번 하시는 말씀마다 족족 나를 이리 부끄럽게 하신다. 선생님은 말미에, 진지한 건 좋은데 지나치게 열심히 하지 말라고 하셨다.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하라고 하셨다. 교실 한 켠에서 "잘해야지, 잘해야지"하면서 독기 부리는 게 선생님 눈에 보였던 모양이다.


인생에서 큰 실패를 겪고 나서, 늘 자신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자각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다. 마음 상태도 바닥, 처지도 바닥, 잔고도 바닥. 경력도 다시 바닥. 하지만, 그렇다고 나란 인간이 계속 바닥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노력하고 있는 한, 나는 계속 올라가는 중이다. 그러다 몇 년이 지나도 그 자리인 것 같아, 몇 개월을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아 처참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 내가 되뇌는 말이 있다. 주로 샤워하면서 뜨거운 물줄기 아래서 말하곤 한다.


"나아지는 중이야"

"나아지고 있어"


그 나아지고 있음을 느끼는 것, 그 나아짐에 대한 감각이 바로 내 희망의 근거다. 긴 연장선 위에서 돌을 굴리는 작은 개미처럼 시간점을 따라 걸어가고 있는 나 자신을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섬세하게 내 변화를 알아챌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해보니, 나는 요가 수련을 시작한 처음에 비해 나아진 것들이 많았다. 늘 긴장하면 귀까지 올라붙던 말린 어깨는 반듯이 펴지고 아래로 내려와, 보기 좋은 목선, 어깨선을 가지게 되었고, 굳어 있던 척추는 말랑말랑해져 업 독 할 때나 바퀴 자세할 때도 훨씬 편안해졌다. 뒤로 몸을 넘기는 쟁기 자세를 할 때 예전엔 발끝이 땅에 닿지 않았는데 이젠 닿는다. 게다가 예전엔 상상도 못 했던 다리 찢기도 얼추 된다. 이런 데도 왜 난 나아진 것들을 보지 못하고, 안 되는 것들에만 불만을 품었을까.


너무 높은 목표는 실용적이지 않다.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건 맞는데, 시기마다 적절한 수준의 목표를 자신에게 배당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느 것 하나 시간의 누적 없이, 노력의 투입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남들이 수년 내에 이룬 것을 몇 개월 내에 이루고자 하는 건, 사기꾼의 욕망이다.


사람들은 단시간에 빨리, 굉장히 극적인 변화를 원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는 부작용도 많고 실제로 불가능할 때가 많다. 실로 대부분의 변화는 느리고 점진적일 때 오히려 이상적이다. 나는 앞으로 '나아지고 있는 나'를 자랑스러워하기로 했다. 여전히 요가 교실 한 구석에서 몸 개그를 시전하며 땀을 흠뻑 흘리고 있더라도 꾸준히 노력하며 발전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나의 나아지고 있음, 그 변화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좋다, 나는 분명 알고 있으니까.


      

[1]

 출처: 청나라 량치차오梁啟超 저서 《이산서표상환영회학설사蒞山西票商歡迎會學説詞》


작가의 이전글 학교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