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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디에도 없는 사람 Oct 23. 2021

학교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들

2부 나아지는 감각

#공부해서죄송합니다

#배우는동안만큼은자유롭게


나는 대학 관련한 악몽을 15년 꿨다.

꿈은 직장을 열심히 다니던 중 불현듯 내가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망히 그 길로 학교에 달려가 수업을 듣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달려간 그곳 교실은, 예전 20년 전에 다녔던 대학 대강의동 그대로였다. 나는 수능에서 원하는 점수를 얻지 못했고, 바라던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다. 학교 네임 밸류보다는 원하는 전공을 따라간다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나의 유일한 기준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단 하나의 대학에 붙었는데, 원하는 전공이었다.         


하지만 입학 후, 긴긴 방황이 시작되었다. 나와 성적 차이가 많이 났던 고등학교 동창과 같은 학교를 다니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 시절 대학은 내 자존감을 가늠하는 척도로 작용했다. 15년간의 악몽은, 이 열등감을 처리하는 내 무의식의 자정작용이었을 것이다. 15년. 한 아이가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할 시간. 취직을 하고 직장에서 승진을 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면서도 어느 대학 출신이라는 것으로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는 일을 그만두지 못했다. 그렇게 누군가, 어느 대학을 졸업했느냐고 물으면,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할 수 있기까지 이 긴 시간을 모조리 썼다.


그러다, 삼십  반에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오고,   같은 나라에서 석사를 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바로 대학원에 진학한 이십  초중반 학교 친구들과 15 이상 차이가 났다. 늦었다면 많이 늦었고, 무엇보다 '무엇을 하러' 대학원에 왔는지 다들 궁금해했다. 내게도 많이 중요한 화두였다. 하지만,  전공으로 석사를  졸업   무얼 하겠다는 확고한 생각이 있어 입학한 것은 아니었다. 공부에 '쓸모'라는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하면, 사람은 위축되기 시작한다. 마음 놓고 세상과 지식을 유영할 자유가 줄어든다. 그래서 처음부터 쓸모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 공부는, 편협해지기 쉽다.


입학을 결정할 당시, 나는 딱 두 가지 확실한 생각이 있었다. 하나는 ‘이 언어에 대해 미련이 남지 않을 정도까지 공부하고 싶다’. 대학시절, 가정 상황으로 인해 원하는 만큼 공부를 못했다. 둘은 ‘실용적인 것을 배우고 싶다’. 학문을 위한 학문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나의 전공이 이 두 질문에 부합했기 때문에, 충돌하는 다른 지점들도 감수하기로 했다.

덕분에 과정 중에 내 예상과는 다른 새로운 바다를 만날 수 있었다. 가령, 72시간에 달하는 실습 규정과, 수업에서 해야 하는 시범 수업은 죽을 맛이었다. 성격에도 안 맞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게 달갑지 않고 에너지가 너무 많이 쓰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사람들은 내 수업에 굉장히 높은 평가를 주고 잘한다고 칭찬했다. 또 앞에서 말한 새로운 바다란, 입학 전엔 잘 알지 못했던 사회 계층이나 지역과 관련한 언어 연구, 화용론, 성별에 따른 언어 사용 등이 굉장히 재미있었다. 아직도 이 주제와 관련된 논문은 언제든지 계속 읽고 알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남들보다 많은 나이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외국으로 석사를 하러 온 내게, 사실은 나란 인간에 대해, 내 삶에 별 관심도 없으면서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무심코 던졌다. "그걸로 뭐 하려고요?" "거기 졸업하면 취직 잘 돼요?" 에휴, 이 사람들아. 나도 모른다. 내가 뭘 하려는 건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쉽게 해서는 안된다는 걸, 나는 아주 나중에 배웠다. 내가 그렇게 해서 남들을 당황시키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 환기시켜준 덕이었다. 나는 더 많이 보고 배우기 위해서, 인간적으로 넓어지고 싶어, 내 길을 찾고 탐색을 하러 이곳에 왔다. 그것이 지금 내 공부의 목적이다. 학위를 따서 뭘 하겠다는 맘으로 오지 않았다. 그건 그때 가서 드는 생각에 따라 정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외국에 나온 이상, 공부의 범위를 학교 내로만 정하지 않았다. 나는, 어학연수를 하고, 대학원 입학한 초기까지 많게는 동시에 6개의 알바를, 적게는 3개를 했고, 그다음부터는 이전 경력과 연결하여 현지 회사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장학금이 있는 해와 파트타임으로 일했던 그 시기에는 학비와 생활비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사회에서, 다양한 업계의 사람들을 만나보고 교류하고 일해보는 경험을 통해 졸업 후의 미래도 가늠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러한 일 경험도 내가 생각하는 ‘공부’의 범위 안에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객관식 시험을 치르고,
1학년을 다니고 그만두었던 고등학교에 복학하는 꿈은 자주 꾸는 악몽 중 하나다. 야심 차게 학교를 자퇴했어도, 졸업한 지 십여 년이 지났어도,
지구 반대편의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어도 그 꿈들은 여전히 나를 괴롭힌다. (...)
배움이란 꿈을 꾸는 일이라는 걸 여기에서 알게 됐다.
앞으로의 날들에는 악몽을 덜 꾸기를 바란다.
대신 배움과 학습에 대한 즐거운 기억들이 자리하기를 바란다.  
나를 포함한 더 많은 이들이
배움에 대한 설레는 꿈을 꿀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중 <배움이란 꿈을 꾸는 것이다> 이길보라    


나는 나만 학교 악몽을 꾸는 게 아니라는 걸, 이 책을 통해 알았다. 지인의 선물로 읽게 된 이 책을 읽는 내내 눈시울이 뜨거워져 난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벌써 갱년기인가 싶을 정도로 자주 눈물이 났다. 식당에서 읽다 눈물이 날 때는 선글라스를 꼈다. 창피해서 맨 눈으로는 버틸 수가 없었다. 한국의 공교육 시스템을 고1에 야심 차게 탈출한 그녀가 오랫동안 학교 악몽에 시달렸던 사실과, 결국에는 '배움이란 꿈을 꾸는 일'이라는 말을 내뱉는 이 순간이 내게 엄청난 '해탈의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왜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그 긴 시간 동안, 이 좋은 말을 들어보지 못했을까. 왜 우리 부모나 선생님은 이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주지 않았을까.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배움이 귀한 시대에 자랐고, 자신의 배움이 가족이나 주변에 피해가 되는 시절을 겪었다. 10남매로 태어난 우리 아빠만 해도, 형제 중에 유일한 대학 졸업자였고 그에 대한 미안함을 지금도 형제들을 만나면 자기가 더 무언가를 하는 것으로 보상하려 시도한다.


시대가 달라졌음에도, 꿈을 꾸는 건 배부른 소리고, 당장 돈으로 환산되지 못하는 일은 그 가치가 덜하다고, 아직도 학교에 가고 배우는 데 시간을 쓰는 것이 사치라고 생각한다면 곧장 삶의 많은 가능성이 닫힌다. 나는 한국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 부족함 없이 돈 걱정 없이 매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회였으면 한다. 그리고 배우고자 하는 흥미도 의욕도 없는 사람들까지 억지로 책상 앞에 앉혀놓고 시간 낭비하는 시스템이 아니었으면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부하는 사람이 더 이상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오기를 바란다. 그 나이가 몇이 되었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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