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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디에도 없는 사람 Oct 22. 2021

외국에서 혼자 벌어 먹고사는 법

2부 나아지는 감각

#조금벌고조금쓰고많이놀고많이배우고

#어쩌다보니N잡러


나도 대학원 생활이 이리 길어질 줄 예상 못했다. 이곳에서 대학원을 다니는 4년 동안, 학비와 생활비를 내가 벌어 썼다. 박람회 부스 통역, e-sports수행 통역, 한국어 과외, 저작권 에이전트, 다큐멘터리 연구원 등 당시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다. 재학 중 네 학기 동안은 장학금을 받는 행운을 누렸고, 첫 학기가 끝나갈 무렵에, 우연찮게 이전 한국에서 일한 경력을 살려 현지 회사에서 협력 파트너로 일하게 되었다. 그 덕에 고정 수입이 생기어 생활이 안정되어 갔다.


대학원을 이렇게나 오래 다닐 줄은 몰랐지만, 그렇다고 최대한 빨리 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인생 중반에 어렵사리 얻은 해외에서의 시간과 공간을, 충분히 쓰고 싶었다. 일과 학업, 개인적인 도전 모두에 골고루.  모든 것을 병행하는 것이 몸은 고됐지만, 심리적으로는 오히려 서로 탈출구가 되어주었다.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자력으로 공부를 해나갈  있었고, 경력 단절에 대한 불안감도 해소할  있었다. 공부가 힘들  일로 도망갈 수가 있었고, 일을 하다 지치면 다시 공부로 돌아가  순수한 재미에  빠졌다.  외의 시간은 산책하고, 사색하고 운동하는  쏟았다.  시간은 나란 인간을 입체적으로 조각했고, 입체적으로 나아지게  주었다.


 내가 거쳐온  가지 직업  방송국 작가 생활 3년은  의미를 찾기 힘들 정도로 몸이 고되고 온통 하기 싫은  투성이었다. 가령, 일주일  나흘을 집에  가고 밤을 새운다거나 생면부지의 부지기수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설득을 하거나 방송에 나와달라고 협박 비슷한 일을 했다. 그런데 돌아보면 걸어온 모든 길에 의미가 있다.  일이 내게  이후 하는 일에 맷집과 기본기를 만들어주었음을   년간 깨닫게 되었다. 모르는 낯선 사람과 전화하는  너무 싫어서 짜장면 주문 전화도 남에게 미루던 내가, 섭외 전화만 하루에 수십 통씩 돌리던 방송국 작가 시절을 견뎠고, 지금은 언제고 누구에게고 전화를 걸고 뭔가를 청할  있는 사람이 되었다.


 외국에서 혼자 산다는 건, 많은 일들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무수한 끼니를 낯선 식당에 앉아 혼자 먹어야 했고, 혼자 집을 알아보러 다니고 부동산 계약을 하고, 은행과 관공서 일도 내가 아니면 대신 봐줄 사람이 없었다. 한 번은 한국에서 받은 프로젝트의 보수 지급 문제로, 대만 국세국(한국의 국세청 같은 곳)에 연락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전화를 십수 통을 돌리고 담당자와 이메일까지 주고받으며 그 일을 혼자 해결하면서 깨달았다. ‘나 이런 거 되게 잘하는구나?’ 나 말고는 이 일을 할 사람이 없으며, 이 일을 기필코 해결하고 말겠다는 확실한 목표의식이 있으니, 사람이 불도저로 변했다.


그 일 하나로 수십만 원이 통장에 들어오느냐 마느냐가 정해진다고 생각하니, 쭈뼛쭈뼛 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시 그 금액은 내 한 달 방세를 웃도는 금액이었다. 현지 친구에게 부탁해 해결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나는 세 가지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첫 번째, 나 혼자서도 충분히 의사소통할 수 있다. 두 번째, 내 문제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세 번째, 언제까지 남에게 부탁할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이러한 N잡들을 통해 떼돈을 벌었는가? 당연히 아니다. 나는 장학금의 보살핌 아래, 한국에서 일하던 당시   생활비의 절반에도  미치는 돈을 벌었다. 때론 그보다   벌었다. 그럼에도 아주  살았다. 내가 사는  나라의 물가가 싸서 그런가 보다 오해해선  된다.  도시의 집세와 외식 물가는 서울에 결코 뒤지지 고 웃돌기까지 하니까. 


나는 여기서 지내면서, 조금 벌고 조금 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현지 친구 중에, 비싼 디저트와 외식을 먹는 , 물건을 사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사람은 없었다.  개월마다 미용실에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계절마다  옷을 사는 이도 없었다. 아무도 남이  입는지 머리를 감는지 자르는지 신경을 쓰지 않았고, 꾸밈에 대한 압박이 없는 사회였다. 한국 사람들이 꾸밈 비용으로 얼마나 많이 쓰는지, 꾸밈에 대한 압박이 얼마나 했던 것인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소비로 스트레스를 푸는 , 꾸밈에 대한 압박   가지만 없어도 전체 소비가  줄었다.


내가  도시에 살면서 느낀 , 먹고 물건을 사는  말고도 스트레스를   있는 방법이 허다하다는 것이다. 예전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는 스스로 자제력을 잃을 정도로 많은 물건을 사들였고 먹고 마시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달랬었다. 하지만 여기선 돈을 쓰지 않거나 저렴한 소비로 즐거울 방법이 아주 많다. 일단, 공공자전거로 강변을 달리거나  트인 야외에 앉아 있을 공간, 산책할 곳이 현저히 많았다. 구립운동센터에 가서 스쿼시, 수영, 요가 탁구, 배드민턴, 검도를 즐기고, 심지어 바다에  스노클링을 해도 비용이 얼마 들지 않았다. 겨울이 되면 나는 온천에 가기를 즐겼는데, 도심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온천 도시에서 종일 힐링을 하고 와도, 교통비를 포함해 비용이 많아야  오천 원을 넘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나라 사람  친구들이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긴축 재정의 사람들이라 돈을  썼던 걸까? 아니다. 여유가 있으면 있는 사람일수록 소비에 신중했고, 지갑을  열지 않았다.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후줄근한 옷차림을 하고, 머리도 자주 감지 않아 떡진 머리가 익숙한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아 갔을 , 나는 거의 경악 수준으로 입을 벌린  한동안 있었다.  집에 같이 갔던 한국 친구는, 진심 부러운 눈망울로 이런 곳에 살고 싶단 소리를 그날 5 이상은 했다. 옷차림 등 외양으로 판단되는 부와 실제 그가 사는 집의 고급스러움, 이 인지 부조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예전에  들어 살았던  주인 아저씨는 자기 소유의 집이 그 도시에만 여러 채였지만, 여전히 매일 새벽 장에 나가 과일을 팔았다. 아저씨의 옷차림은 일하기 좋은 낡은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길에서  아저씨를 마주친다면 오 이 사람 돈이 꽤 있겠는 걸, 호화 저택에 살겠어라고 생각할  있는 모습이 절대 아니었다. 부를 과시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된다. 경제적인 여유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돈이 없다는 이유로 박탈감이나 불행감을 느낄 일이 적었다.


이곳에서 지내면서 수입이 줄어드니, 소비를 줄이는 것이 당연했고, 소비하지 않고도 즐거울 방법들을 찾아갔다.  이상 외모를 꾸미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고, 옷차림은 간단해졌다. 물론  수입으로는, 생활비와 학비만 감당할 수준이었기에, 전혀 저축 따윈 하지 못했다. 가끔 친구랑 바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호사를 부리지 않고, 좋아하는 요가 수업도 다니지 않았더라면 저축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들은 당시 저축보다  행복을 책임져주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기꺼이 지출하고 투자했다.


 마지막으로, 지난 4년간 나의 살림살이는 학기마다 기숙사 방을 빼는 숱한 교환학생과 퇴실생 들에 온전히 빚진  있다. 그들이 방을  때마다 아주  만한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왔다. 책상 스탠드, 헤어드라이어, 샤워 커튼, 침구, 세제, 샴푸, 화장품, 화장지, 신발, 바지, 방석, 의자, 매트리스 이러니 새로 물건을  이유가 없었다. 버려지기에는 너무나 ‘쌩쌩한물건들이, 지난 4년간 내게로 와서 생명을 연장했다.  학기가 끝나갈 무렵이면 나는 득템을 했고, 그만큼 돈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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