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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디에도 없는 사람 Oct 21. 2021

나이 든 여자의 롤 모델

1부 딸들은 자라서 엄마가 될까

#앞사람의발자국을따라걷는밤

#완벽한롤모델이라는환상


내가 좋아하는 어느 남자 영화배우의 기사를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나이와 상관없이. 중년 혹은 더 훌쩍 넘어선 나이가 되어서도 다양한 삶의 롤 모델이 있는데 여자는 왜 없지 싶었다. 특히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것을 생각하면 그러하다. 대부분의 영화 주인공이 남자들인 이유다. 이야기가 다양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겐 그 수단이 정당하든 비열하든 돈을 버는 직업이 있다. 그러나, 나이 든 여자는 어떠한가. 조금씩 달라지고는 있지만, 미디어가 그리는 여자의 직업은 대다수가 '엄마'가 아닌가 싶다. '엄마'를 돈을 버는 생산적인 직업으로 인식해준다면 말이다. 엄마는 신분인가, 직업인가, 관계인가, 뭔가.


나는 마흔이 넘도록, 엄마가 되지 않았고, 누군가의 아내도 아니다. 그러고 나니, 나는 대체 어떠한 삶을 추구해야 하는지, 무엇을 삶의 핵심으로 두어야 하는지 살면서 자주 멈칫거리게 되었다. 나 혼자 몸도 챙기기 바쁘다고 생각할 때마다 이기적인 것 같은 죄책감이 찾아오는데 이게 대체 맞는 감정인가. 육아에, 가사에, 시댁 문제 등 가정 관련한 문제에 지친 친구들의 고민을 들을 때마다 나는 더없이 심플한 내 삶에 감지덕지  군말 말고 살아야 하는가.


그럴 때 나는 삶의 모델이 되어줄 만한 이가 어디 있을까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하지만, 나 같은 나이 든 여자에게 참고할 만한 자료가 너무나 적은 게 아닌가 싶다. 내 나이대의 여자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나. 워킹맘들이 늘고 있지만, 그들 역시 '맘'이라 나의 참고 대상은 아니다. 남자들은 자신을 말할 때 얼마나 간단하게 '아빠'라는 정체성에서 분리될 수 있는지 보라. 여자의 성공, 혹 성취를 무엇을 기준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 그 이후 자주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금 한국 또는 아시아에서 나이 든 여성의 삶이란, 가정과 엄마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궤도를 벗어난 부족한 삶이라고 낙인찍히기 쉽다. 그것이 결핍된 삶은 잘못된 삶, 낙오된 삶, 틀린 길. 미혼의 여성이 나이 들어갈 때, 무엇을 바라봐야 할까. 주변의 친구들이 육아로 바쁘고, 아이들 사진과 동영상을 SNS에 올리기 바쁠 때 그런 자신과 다른 삶을 바라보면서, 엄마가 되지 않은 여성, 아내가 되지 않은 여성에게는 공허감, 낙오감, 박탈감만이 남아 있는가? 다른 삶을 상상하고, 창조하고 추구하는 것. 여성이 지닌 놀라운 능력을 생각하면 가능할 것이다. 더 많은 여성의 삶을 찾아보고 연구해보고 싶다. 내 나이의 여자들 어떻게 나이 들어가고 있을까.


여기까지가 외국으로 대학원에 오기 전에 써둔 글이다. 지난 4년 간 대학원에 진학했고 좌충우돌 학업과 생활 전선에서 분투하느라, 사실 롤 모델이고 뭐고 돌아볼 틈이 없었다. 살펴봐도 나 같은 처지의 사람은 찾기 어려웠고, 참고할 만한 사람을 찾는 것보단 나 자신을 들여보는 게 더 쉬웠고 빨랐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잘하는 게 뭔지, 어떤 일을 할 때 즐거운지, 어떻게 하면 내 노력을 더 가치 있게 환산할 수 있을지 찬찬히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지금의 여성은 이제껏 이전 세대의 여성이 누려본 적이 없는 사회적인 위상과 경제적인 자유를 가졌다. 동시에, 전통적인 역할도 완전히 폐기하지 못한 채 울며 겨자 먹기로 수행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겪는 딜레마와 자기 분열을 피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엄마들이 아침밥을 자기 손으로 해먹이지 않아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고, 아이 손을 잡고 잠옷 차림으로 나와 조찬점에서 밥을 먹는 일이 정상인 나라에서 살아보니, 여성에게, 엄마에게, 그리고 또 아빠에게, 남성에게 우리 사회가 씌운 굴레가 얼마나 허상에 가까운 것인지 깨달았다. 그 땅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지금 내가 얼마나 큰 자유를 느끼는지.


이 글 역시 내 안에 답이 있어서 쓰기 시작한 글은 아니다. 어쩌면 나는 롤 모델을 찾고 싶었다기보다는 잘 보이지 않고, 불안한 앞날 앞에서 어떻게 한 발 한 발 내디뎌야 하는지 모르는 답답한 마음을 더 토로하고 싶었던 거 같다. 안정된 삶의 궤도에서 튕겨져 나와, 검은 덤불 속을 혈혈단신 낫 하나 들고 헤쳐나가는 것 같은 날들 속에서 롤 모델이 있으면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지, 나처럼 살았던 이는 없는지 희망의 증거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런 의미에서 롤 모델은 ‘성공한 사람’보다는 남들이 해보지 않은 일을 도전하고, 가보지 않은 곳에 발을 들여놓은 이들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결과적으로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었는지, 가시적인 성취를 이루었는지에 상관없이 말이다. 이미 자기 결정에 확신이 있고,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아는 사람에겐 롤 모델이 굳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안내서, 가이드가 필요한 이들은, 정작 사람 발자국 하나 나 있지 않은 방향의 길을 노려보며 거기로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이들이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 징검다리 게임을 기억하는가? 자기 발 밑이 올라서기만 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판유리인지, 두 사람의 체중도 거뜬히 견딜 강화유리인지는 누군가 올라서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롤 모델은 자기가 선택한 길, 방향에 자신이 없을 때, 이 길 끝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을 때, 미리 개척한 자의 지혜를 빌리는 기회이다.


나 역시 대단히 성공한 삶도 아니고, 누군가의 롤 모델이 될 수 있다 생각은 안 하지만, 내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우주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 텐데, 비슷한 일을 겪고, 유사한 상황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이들이 있을 텐데. 우리가 연결될 수는 없을까. 연대해서 힘을 주고 도움을 줄 수는 없을까. 내가 여기 있다고 먼저 소리를 내지 않는 한, 우린 서로를 찾을 수 없을 것이기에 그래서 내가 먼저 외쳐보기로 했다.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 혹 잣대로 보면, 엄밀히 말해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한 마흔이다. 아내도 아니고, 엄마도 안 됐으며, 부장님도 못 됐다. 나만 없는 건 아니지만 돈도 없고, 집도 없는, 명함도 없는 마흔이다. 30대 중반부터 나는 ‘무엇이 되기’ 보다 ‘어떤 것을 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과 돈, 에너지를 써왔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그래서, 무엇이 될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에게 나는 해줄 말이 별로 없지만, 뭘 할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실패할까 봐, 후회할까 봐, 힘들까 봐 무섭고 겁나서 시작, 시도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서 하라고 응원하고 밀어주고 싶어서였다. 아직 우리 삶이 끝나지 않았고, 많이 많이 남았으며, 포기도 좌절도 하기엔 이르다고.


최근 몇 년 간 여성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여성 서사들이 봇물처럼 영화, 드라마, 소설을 막론하고 넘쳐나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 중인 더 많은 여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자신의 이야기를 말함으로써 밤하늘의 별처럼 점점이 흩어진 개별자들이 선으로 연결되는 상상을 해본다. 나는 여성의 말하기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거라 믿는다. 나는 지난 시간, 세상 잘난 어떤 롤 모델보다 저마다 자신의 위치에서 엄마로, 아내로, 신입으로, 공시생으로, 외주자로, 알바로, 묵묵히 자리를 지킨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영감과 에너지를 많이 받았다. 나는 어쩌면 롤 모델이 아니라, 지지와 연대가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한 여자가 자신의 삶에 대한 진실을 말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
 -시인 뮤리엘 루카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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