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글
《딸들이 자라서 엄마가 된다》라는 제법 유명한 책이 있다.
엄마들도 모두 딸이었던 시절이 있다.
하지만 모든 딸이 엄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바로 나처럼.
나는 마흔이 넘은 지금,
엄마는커녕, 아내도, 커리어우먼도 되지 못했다.
어떠한 역할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존재가 여기 있다.
사실 나를 어떤 역할로가 아닌, 그저 나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저런 역할들을 뼈 빠져라 수행만 하다가 정작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알지 않나.
10대와 20대에 풀었어야 하는 인생의 숙제를 제때 하지 못한 까닭에,
나는 30대를 훌쩍 넘어서 인생이 통째로 브레이크가 걸려버렸다.
아닌 밤중에 토사곽란이라도 하듯, 가까운 사람들을 급작스레 밀어내고
하던 일을 중도에 그만두고,
나라를 떴다.
그렇게 서른 후반에 외국에 나와 혼자 지내며 공부를 하고 일을 했다.
인생 중반에 뼈아프게 얻은 유예의 시간 동안, 어린 시절부터 다시 톺아보았다.
돌아보니, 다시 만나야 할 시절과 순간들, 사람들이 있었다.
그 시간들을 거쳐 나는 아주 천천히 어른이 조금 되었다.
엄마도, 아내도, 커리어우먼도 못 됐지만, 나는 내가 되었다.
그 시간 동안 내내 글을 썼고, 사람들을 만났다.
이곳에 풀어놓는 이야기들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