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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디에도 없는 사람 Oct 18. 2021

손 끝을 스친 그녀의 피부는

1부 딸들은 자라서 엄마가 될까

#수능다음날의재난

#피부가맘대로안되는사람들

아직도 수능 다음날 아침이 어제인 듯 생생하다. 이미 지난밤 수능 가채점을 마쳤고, 인생 첫 큰 시험을 통 크게 말아먹었으니 학교에 와서도 죽상만 때리고 있었다. 죽상인 이유가 또 하나 있었는데 그날 얼굴 피부가 크게 뒤집어져서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간 오돌토돌한 작은 여드름을 달고 살긴 했어도 이렇게 큰 면적의 피부에 재난이 덮친 것은 처음이었다. 그날 아침 발병한 피부병이 이후로 10년 넘게, 또 이렇게 평생 시달리게 될 줄 그때는 전혀 몰랐다.


아직 면역 피부질환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던 때라 나도, 의사들도 무지했다. 첫 몇 년은 피부과를 전전했고,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을 깨닫고 증상이 아니라 원인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에 용하다는 한의원을 찾아다녔다. 값비싼 한약도 마다하지 않았고 아파서 헉, 소리도 내뱉기 어려운 벌침도 수두룩하게 맞았다. 봉독이라 불리는 벌침을 두피와 배 한가운데에 수십 방을 맞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는 벌침을 맞은 자리에서 흐른 피가 관자놀이 옆으로까지 내려오는 그로테스크한 지하철 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웃기지만, 당시엔 아프고 서러워서 눈물이 절로 났다.


대체 어떤 피부병이었길래 이리도 지독한가. 병명은 증말 지루하도록 안 낫는다는 지루성피부염이었다. 주요 발병 부위는, 코 양 옆과 아래턱, 심할 때는 피지선이 있는 몸의 거의 모든 곳에서 증상이 보이는 난치병이었다. 피가 날듯 빨개지고(심지어 겨울에는 피부가 갈라져 진짜로 피가 났다), 간지럽다가 표면의 피부가 죽은 듯 여러 층이 일어나 벗겨졌다. 면역력과 직결되어 있는 골 때리는 피부병이었다. 입시 스트레스, 가정의 와해로 인한 심리적 방황, 잘못된 식습관(난 고등학교 시절 거의 매일 저녁 떡볶이를 먹었다)이 만들어낸 괴물이었다. 마치 수능을 무사히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기라도 한 듯, 수능 다음날 아침 발병해 어깨에 붙은 할매귀신처럼 나를 수십년 간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고 있다. .  


사람이 사람을 만날 때 제일 처음 그리고 오래 보는 것이 얼굴일 것이다. 그 얼굴 피부에 이런 흉측한 병이 났으니,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웠다. 이유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너 얼굴 엄청 빨갛다고, 피부가 왜 그러냐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던졌다. 난 이제 대학에 가서 예뻐질 거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건데. 울긋불긋하고 허물이 허옇게 일어나는 이 얼굴로 어떻게 사람을 만난단 말인가. 나는 증상이 심한 날엔 눈앞에 있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연애고 뭐고, 사람 자체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자존감은 계속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돌이켜보면, 아무도 나를 제대로 돌봐주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내 몸과 마음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는데, 그 상태가 피부로 드러난 것뿐이었다. 중1 때 시작한 생리는 단 한 번도 제때 맞춰 오는 경우가 없었다. 심지어 두 달, 세 달, 6개월에 한 번 오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내가 돈을 벌어 병원을 다니기 전까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거나 해결해주지 않았다. 가족 중에 내 피부 문제에 그나마 자주 걱정을 표하고 물어봐주는 건, 이후 아빠와 재혼한 새어머니뿐이었다.


나는 사춘기 내내 자잘한 여드름이 얼굴에 났고, 열심히 세수를 하고, 얼마 안 되는 용돈으로 그 당시 티브이에서 광고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스킨과 로션을 사서 썼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드름이 사라지지 않았다. 겨우 몇 천 원에 불과한 그 화장품이 무슨 대단한 도움이 되겠는가. 나는 남들도 내 피부 같은 줄 알았다. 다른 사람의 피부를 만져본 적이 없으니 모두가 내 피부 같겠거니 한 것이다. 우리 가정은 스킨십이 거의 없었다. 가족의 피부도 나는 만져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러다 어느 날, 어쩌다 친구의 뺨을 쓰다듬게 됐는데, 얼어붙듯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것이다. 이게 대체 뭔가! 그때 생각했다. 이게 여자 피부구나. 이게 여자구나. 꺼끌거려 마치 수세미 같던 내 뺨과 이 솜사탕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대학 4년 내내 나는, 자주 우울했고 생리는 들쭉날쭉했고, 피부는 보름달이 뜬 날의 미친년처럼 예고도 없이 뒤집어졌다.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이 사이코패스 같은 피부병을 나는 맘속으로 영혼을 다해 수도 없이 저주했고, 신의 이름을 부르며 수도 없이 기도했다. 제발 이 피부병을 가져가 달라고, 낫게 해 달라고.

20대 나를 제일 심리적으로 괴롭혔던 것 중 하나인 이 피부병도, 내가 직접 돈을 벌면서부터 비로소 해결하기 시작했다. 겨울이 되면 건조해진 기후 탓에, 간지럽고 갈라지고 피까지 났던 피부들. 다양한 화장품을 사서 시험해보기 시작했고, 외국의 유기농 보습 제품을 알아보고 돈을 들였다. 땀이 잘 나지 않는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헬스를 다녔고, 운동을 했다. 그렇게 피부에 좋은 것들을 바르고 먹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증상들이 컨트롤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천성적으로 전형적인 '여성성'을 지향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옷도 헤어도, 말투도, 화장도 어느 것 하나 전형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날 미혹하지 못했다. 난 중성적이고 심플한 것을 좋아했다. 남자도, 여자도 모두 어울리는 것, 유니섹스가 내 스타일이었다. 그렇기에 깨끗하고 맑은 피부는 더욱 내게 절대적인 필수불가결의 조건이었다. 피부는 내게 자존감과 직결된 문제였다. 피부가 곧 내 미모였다. 피부 상태가 좋으면 기분이 좋았고 자신감이 넘쳤다. 누굴 만나도 상대가 나를 좋아해 줄 것 같았다. 피부가 문제가 생긴 날에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방문도 나서기 싫고 집 앞 슈퍼 가기도 꺼려졌다.


30대 동안 나는 열심히 운동을 했다. 직장생활로 건강을 잃은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벌떡 일어나 운동으로 활로를 찾곤 했다. 이제는, 이 난치병과 같이 살아가는 지혜가 생겨서인지, 몸도 더 문제를 일으키기에 늙어버렸는지 아니면 외국에 나와 지내면서, 바뀐 식생활과 습윤한 기후 환경 덕인지 예전에 비하면 피부 측면에서는 천국의 생활을 한다. 물론 아직도 잠을 못 자거나 생리 직전, 몸 컨디션이 떨어지는 날이면 가벼운 증상이 올라오지만, 예전처럼 심각한 지경으로까지 나아가진 않는다. 주변에서 피부 때문에 고생하는 친구들을 본다. 아토피가 가장 흔할 것이고, 햇빛 알레르기, 가볍게는 다크서클, 만성 뾰루지 등등. 저마다 신체가 갖고 있는 한계와 문제점, 생활과 심리의 문제가 있다.


여자에게는 피부 건강이 중요하다는 말은 내가 하려는 말의 핵심이 결코 아니다. 남녀 불문하고 건강한 피부는 자신감과 직결된다. 피부에 문제가 생기면, 여성은 그 문제를 자신의 자아상과 분리해 생각하기 어렵다. 쉽게 말하면, 피부로 엉망이 된 얼굴과 몸을 가진 채로, 자신을 사랑스럽다거나 예쁘다고 생각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대인관계와 사회생활에도 큰 불편함을 가져온다. 남성에게 피부 문제가 갖는 중량감에 비교해 안타깝게도 여성이 이 부분에서 더 취약하다. 여성의 시각적인 면, 외관을 더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피부는 증상이지, 내가 아니다. 내 몸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것이 내 전부는 아니다. 이것을 나는 피부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얼마 전 오랫동안 심한 아토피로 고생한 분의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그 고통과 치료가 어려운 그 난치병이 주는 절망감이 육성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분의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자신의 문제를 '남들이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과, 마치 별 것이 아닌데 유난을 떠느냐는 듯한 주변인들의 무심한 말들이었다. 우리는 친구나 동료를 만날 때 첫인사로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들을 건넨다.  "오늘 피부가 왜 이래요?"  "피곤한가 봐? 코 옆에 뭐가 났네."  "거울 봤어요? 잠 못 잤나 봐." "각질 제거 좀 해야겠다. 심한데?" 생각해보라. 그렇게 니들 눈에 뻔히 보이는 증상을, 정작 본인이 모르겠는가. 해결할 수 있었으면 그렇게 보기 싫은 꼴로 남들 앞에 있겠는가. 그런 문제는 누구보다 본인에게 제일 잘 보인다. 그리고 제일 싫고 곤란한 것도 본인이다.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나온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그냥 모른 척해.

너희들 세상에선 다 말해주는 게 우정인지 몰라도

어른들은 안 그래.

모르는 척하는 게 의리고 예의야.


피부는 그의 껍데기다. 하지만 그 안의 (마음 혹은 건강) 상태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껍데기다. 껍데기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껍데기일 뿐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이유이다. 걱정해주는 마음이라면, 마음으로만 하라. 그가 넉넉히 자신의 피부 상태를 통제할 수 있기까지 자신의 약한 부분을 컨트롤할 수 있을 때까지 같이 묵묵히 기다려달라.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있다가, 어느 날 그의 피부가 눈부시게 깨끗해진 날, 같이 기뻐해 주라. 그것이면 충분하다.


 *아직도 난치성 피부 문제로 인해 고난의 길을 걷고 계신 분들의 빠른 치유와 평안을 마음 깊이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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