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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야 Jul 01. 2023

꽃들의 자리

episode 04.


 꽃이 진 자리는 의외로 황망하지 않다. 꽃은 시들 때도 낭만적이라는 것을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식물에 일절 관심이 없던 나로서는 자연이 순환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큰 가르침이 된다.


 이곳에 왔을 때 가장 매료되었던 것은 마당 가득한 내 허리춤까지 오는 흐드러진 들꽃들이었는데, 어느 날 늦잠을 자고 일어나니 집 앞 꽃밭이 몽땅 밀려있었다. 아, 몽땅이라기 보단 듬성듬성 눈에 잘 보이는 꽃만 남은 꼴이었는데, 특히나 내가 제일 좋아하던(그러나 이름은 모르는) 잔 꽃들이 홀랑 사라진 것이 너무 속상했다.

  

부분 삭발을 당한 속상한 꽃밭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상냥하고 부지런한 이웃집 아저씨가 동네 잡초들을 정리하는데 정글에 가깝게 우거진 이 집 마당이 포착된 것이다. 사람 다니는 길에 허리까지 우거진 잡초들은 내 눈에만 예쁠 뿐, 사실 좁은 길을 오가기엔 불편하긴 하다. 그렇게 낭만이고 나발이고 이름 모를 잡초들은 단칼에 베어졌고 나는 우울했다.

 게다가 사방에 널리고 깔린 게 비슷비슷한 풀들이니 이 꽃밭에 울타리라도 치고 팻말을 세우지 않는 한 딱히 특별할 것도 없을 테지만 내겐 어린 왕자의 장미 같은 존재였단 말이다!

  

 꽃밭이 이발당하던 그 슬픈 결말을 자느라 놓쳤다. 나는 아마 이 동네에서 제일 늦게 일어나는 인간일 테니 새벽녘 벌어진 삭발식을 말릴 수도 없긴 했다(참고로 이곳 주민들은 새벽 대여섯 시경 하루를 시작하고, 나는 여덟 시가 넘어도 이불속에 있다).





 뎅강 베어진 양귀비와 들꽃 잔해를 치우던 것이 고작 얼마 전인데, 어느 순간 보니 그 자리에 더 파란 잎들이 가득하고 양귀비는 그 수가 더 많아졌다. 그 이름 모를 들꽃들의 군집은 넓어졌으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자연에 무지한 도시 여자는 이렇게 순환의 진정한 의미를 배워 나간다. 베어내며 씨앗이 흩어지고, 베어진 것들이 땅을 비옥하게 만든다는 자연의 진리를 모르던 무지함이 괜한 속상함만 자아냈던 것이다.



다시 빼곡히 채워진 초록들


 초록잎 가득한 길가에 갈색빛으로 저물어가는 꽃들이 명암을 만든다. 제 몫을 다하고 이제 피어나는 것들을 위해 배경이 되어주는 것이다.

 아름다운 그림을 위해서는 어두운 색도 반드시 필요하다. 어쩌면 인생도 이와 같다. 인생의 빛나는 시절이란 그와 대비되는 어려움이 있기에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다. 또한 내게 임무를 완수한 것들이 떠나가고 새로운 것이 그 자리를 채우듯, 인생은 오고 감의 사이클을 반복하는 것임을 자연에서 배운다.


 한 번 베어진 꽃은 더 강한 줄기로 다시 꽃망울을 맺는다. 뿌리가 남아있는 한 언제든 다시 꽃 피우게 되는 것이다. 어느새 다시 푸르게 피어난 꽃밭 앞에서 내 인생을 바라본다. 나도 인생의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더라도 흐드러지게 꽃잎 날려 보았으니, 이제는 후회 없이 다음 꽃망울을 맺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 본다.


 

박제된 산책길의 추억


 + 지난 몇 주간 산책을 오가며 꺾은 들꽃들을 책 사이에 꽂아 말리는 중이다. 집에 돌아가면 이 압화들로 만든 액자를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둘 것이다. 나의 아팠던 시간이 상처로만 남지 않았음을, 그를 떠나 도망친 곳에서 발견한 내 인생이 이토록 다채롭고 아름답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꽃을 굳이 왜 꺾었냐 타박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위대한 자연의 생명력이 얼마 후 같은 자리에 더 큰 꽃망울을 만들어 냈음에 죄책감을 조금 덜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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