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는 마을은 지대가 높고,뒤에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불과 4킬로 떨어진 읍내보다도 2~3도가량 기온이 낮다. 특히 건물이 몇 없기 때문에 한낮의 열기가 저녁이 되면 금세 사그라지고 바람도 훌훌 잘 통한다. 그래서인지 열대야도 없고, 이 더운 날 고작 선풍기 두 대로 살아내고 있다.
문이란 문은 죄다 닫고 에어컨 빵빵 틀고 보내던 서울의 여름과 비교하면, 올해 이곳에서의 여름은 꽤나 감각적이다.
선풍기 바람 솔솔 쐬며 햇빛이 부서져내리는 마당을 바라보면 여름의 밝은 색채에 기분도 밝아진다. 여름 꽃들은 꽉 짜면 물감이 쭉 나올 것처럼 그 채도가 엄청나다. 초록의 쉐이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상파 화가들이 자연 속에서 왜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 이해하게 된다.
그늘막에 숨어있는 고양이들이나 밤나무 위에 앉아있는 새들을 구경하다 보면 행복한 기분이 든다.확실히 동물들의 움직임에는 오직 이 순간에만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다.
초록 하나만 담긴 집 앞 풍경
한낮의 햇볕에 바짝 말린 이불에서는 따듯한 풀 냄새가 난다. 먼지 팡팡 턴 이불을 정리한 후, 찜질방에서 등 지지는 기분으로 거실에서 뒹굴다 보면 어느새 아이가 다가와 땀으로 끈적해진 팔로 내 목을 껴안는다. 아이에게서 새콤한 여름 냄새가 난다.해가 길어지니 우리의 하루도 길다. 낮잠을 실컷 자고 일어나도 해가 쨍쨍하니 아이는 놀고 놀고, 또 논다.
문제는 가뜩이나 체온이 높고 더위를 잘 타는 아이에게는 한 낮이 꽤 버겁다는 것이다. 워낙 쉬지 않고 움직이기 때문에밖에서 조금만 놀아도 머리가 퐁당 젖어버리는 데다가 금세 양볼이 벌겋게 달아 올라, 혹시 햇빛 화상이라도 입을까 걱정도 된다. 강시처럼 선크림을 치덕치덕 발라도 소용이 없다. 선크림이 흡수되는 시간보다 땀이 한 바가지 흐르는 시간이 더 짧기 때문이다.
이곳에서의 우리 삶을 도와주러 온 가족들도 마찬가지이다. 35도에 육박하는 날씨가 되자, 나만 빼고 모두가 바닥에 녹아내려 있었다. 에어컨 대신 얼린 생수병 까지 등장했다. 비가 오기 전 며칠 만이라도한 낮 무더위를 버틸 대책을 마련해야 했고, 결국 에어컨 바람을 찾아 카페로 피신하기로 했다.
동네 변두리에 멋들어진 독채 카페들이 여럿 있기 때문에 카페를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물론 나만 재밌다. 이 사람들은 이쁘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에어컨만 빵빵하면 되기 때문이다. 나의 급작스런 시골 피신에 다 같이 무더운 휴가를 보내게 된 것에 책임감을 느끼며 피난 작전을 수행한다.
작전 시간은 제일 더운 2시경, 시원한 에이드에 간식까지 한 방에 해결 가능한 작전지로 향했다. 죽치고 앉아있는 진상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먹는 시간을 고려해서 치밀하게 메뉴를 구성한다.
오미자 에이드에 호두과자를 잔뜩 먹으며오래간만에 에어컨 바람을 만끽했다. 한 여름 열일해야 할 에어컨은 덩그마니 서울에 남겨두고 여기서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웃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이렇게 예쁜 카페를 찾아냈으니 나름 성공적이었던 작전을 자축하며 시골집으로 돌아온다.
지브리 재질 여름날 풍경
녹색 호수 같은논 밭을 지나 저 멀리 보이는 산을 향해 차를 몬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한 여름의 동화 같은 풍경을 보다가 아이가 갑자기 "이뻐!"라고 감탄을 했다. 이 곳에 와서 옥수수와 키재기를 하며 쑥쑥 자라더니, 어느새 입이 트여 감탄사를 내뱉는 것이 귀엽고 대견하다.